2016. 1. 1. 20:52

 

 

 




::돗님, 리호님과 함께하는 드림버스의 글입니다

::오리주가 등장합니다






Mistletoe

 

 

 

 

 



“보통은 아무 마음이 없는 상대에게 키스하진 않잖아. 그렇지? 두 남녀가 키스를 했다면, 특히 남자가 여자에게 키스했다면 그 남자는 분명 여자를 좋아하는 거잖아? 뽀뽀도 아니었어. 키스였다고. 좋아하……는 건지 확실히는 몰라도 호감 정도는 있는 거잖아? 심지어 내가 먼저 해달란 것도 아니었는데 -그럴 명분도 없지만- 그쪽에서 먼저 키……스 하는 건 아무리 봐도 날 좋아하는 거잖아? 역시 그렇지?? 그런데 왜, 도대체 왜!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는데 왜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하냐고-! 하아…….”

 

트루디가 말을 거는 상대는 1층 플로어의 물고기들이었다. 둘 사이에 그 일이 있은 후로 며칠이 더 지나서 어느새 크리스마스를 앞둔 느긋한 이브의 오후, 트루디는 플로어의 물고기들에게 밥을 주며 중대한 사건을 논의하던 중이었다. 과연 로키가 나를 좋아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얼만큼? 지구의 -연인들의- 축제인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이제 막 키스를 한 어색한 두 남녀는 어떤 크리스마스를 보내야 하는가? 물론 물고기들이 대답할 리는 없었다. 그래도 누군가에게 이 문제를 털어놓는 것만으로 트루디의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처음엔 윗집 키티에게 조언을 구해볼까 싶다가도 -키티는 그 ‘토니 스타크’와 꾸준히 교제하는 연인이니까- 곧, 키티가 로키의 정체를 알고 있단 사실을 떠올리곤 관두었다. (전 쉴드 요원에게 맨해튼을 박살낸 침략자와 키스했다고 말 할 수 없었다.) 그 다음엔 아래층의 유나에게 조언을 구해볼까 싶었지만……. 트루디가 보기에 유나는 버키와의 일로 바빠 보였다. (요즘 유나와 버키의 사이가 유독 좋았다.) 그렇다고 토니에게 말 할 수도 없었고, (제정신이라면 절대 그러진 못 할 거다.) 버키에게 말 할 수도 없었다. (이건 말 안 해도 당연하다.) 친한 친구들은 방학을 맞아 전부 서부로 떠났고, 이 사건의 주범인 로키에겐…….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수건을 사이에 둔 키스 비스 무리한 것을 제외한다면 둘의 첫 키스 후로 트루디는 로키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는 몇 시간을 겪어야만 했다. 끔찍하게 부끄럽고 민망한 시간이었다.

“실은 아직도 로키랑 눈만 마주쳐도 도망가고 싶어지는데. 그런데 내일은 크리스마스고……. 있잖아, 어떡해야 좋을까?”

테이블에 턱을 괸 트루디가 물었다. 어항 안의 물고기들은 대답 대신 물속을 뱅글뱅글 헤엄치며 물거품을 뱉어냈다.

 

*       *       *

 

“커피, 마실 거야?”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는 중인 트루디가 간신히 벽에 기대어 서있는 반면 로키는 아무렇지도 않게 머그를 꺼냈다. 그리고는 다 식어버린 포트의 전원을 올리고 찬장에서 트루디의 머그를 꺼내며 고개를 까딱였다.

저기, 잠깐만요. 우리 방금 키스했잖아요. 트루디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도 생생한 로키의 향과 어깨를 감싸던 크고 단단한 손, 겨우 5미리 정도의 거리에서 바라본 반쯤 감긴 로키의 눈동자, 입술이 잠깐씩 떨어질 때 로키가 내뱉던 한숨, 수증기, 시원한 로키의 혀, 자신도 모르게 배배꼬이던 야릇한 기분을 떠올리면 -아니 떠오르는 것을 버텨내고 있으면- 도무지 입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도대체 지금 이 상황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어떤 말을 해도 바보 같은 상황이 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정작 로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끓기 시작한 커피포트를 들어올렸다.

“마실 거야, 말 거야.”

“아, 안 마셔요.”

“그럼 언제까지 거기 서있을 건데?”

머그에 커피를 반쯤 채운 로키가 커피를 휘젓던 스푼을 내려놓고는 소파로 돌아갔다. 그러는 사이 트루디는 간신히 의자에 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니, 잠깐. 우리가 키스했다고? 왜? 로키가 트루디에게 키스할 이유가 있던가? 게다가 어젯밤 일이 꿈도 아니라고? 키스를 했으면 그 다음엔? 그냥 다시 평범한 동거로 돌아가는 건가? 아니, 잠깐. 그런데 두 남녀가 동거를 하는 일 년 동안 아무 일이 없었잖아. 그럼 이제 시작이라는 건가? 로키도 나를 좋아하나? 아니, 그런데 우리 사귀는 건 아니잖아. 우리 키스해도 되나? 아니, 잠깐. 잠깐만. 그런데 내가 진짜 로키랑 키스했다고? 아스가르드에서 온 왕자님이랑? 내가 좋아하는 외계인이랑? 아니, 그런데, 내가, 진짜?

“왜 그렇게 파닥거려. 뭐야, 부끄러웠어?”

거실에서 로키의 목소리가 들렸다. 트루디는 몇 번인가 입을 벙긋거리다가 결국은 대답하는 걸 포기하고 이상한 소리가 새어나올 것 같은 입을 막았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집에서 도망쳐서 키티네든, 유나네든, 1층 플로어든, 아니면 맨해튼 밖으로라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정말로 로키에게 부끄러운 걸 들킬 것만 같아서 간신히 참았다. 대신 트루디는 새빨간 얼굴로 화장실에 들어가서는 두 시간동안 샤워를 하고 나왔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로키는 잠시 밖에 다녀온다는 쪽지를 남기고는 사라진 뒤였다. 트루디는 조금 진정한 상태로 소파에 앉아 다 식은 커피를 마셨다. 두세 번 숨을 고른 트루디는 얼마 지나지 않아 소파 위에 쓰러져서는 이상한 비명을 질렀다. 오래도록.

 

로키는 나간 지 네 시간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어디에 다녀왔냐고 물을 용기는 차마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이 충분한 시간을 가진 트루디는 예전처럼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 진정한 상태로 그를 대할 수 있었다. 트루디가 저녁을 준비하는 걸 깜빡해서 둘은 다시 밖으로 나갔다. 저녁은 종종 가는 평범한 레스토랑에서 먹었다. 가끔 그랬듯이 연인이라는 오해도 받았고, 디저트로 나온 포춘 쿠키에서 ‘인연에 진전이 있을 것이다’라는 단골 멘트도 나왔다. 하지만 트루디는 다 들켜버린 지 오래인 짝사랑에 진전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어쩌면 서로의 모습이 연인으로 보이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로키가 도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하고 있었는데도 트루디는, 어쩐지 그가 약간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즐겼는지도 모른다.)

아파트로 돌아온 둘은 간단히 씻고선 잠깐씩 딴 짓을 하다 12시가 되기 전에 침대에 누웠다. 그러고 보면 로키와 한 침대에서 잠든 지 1년이 다 되어간다. 처음 한 침대를 쓰기로 했을 땐 로키가 엄청 쀼루퉁했었지. 트루디는 처음 아파트를 둘러보던 날을 떠올렸다. 로키는 굳이 가장 큰 사이즈의 침대를 원했고, 그런 침대가 들어가는 방은 제일 큰 방 뿐이었다. 하지만 아파트는 거실이 넓었고, 제일 큰 방 다음의 방은 너무 작아서 제일 작은 침대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거실에 침대를 놓자니 로키가 싫어했고, 큰 방에 침대를 두 개 두자니 그것도 로키가 싫어했다. 트루디는 그 당시 이 문제를 놓고 사흘을 고민했다. 로키가 지구에 머무는 동안에는 가장 좋은 대접을 해주고 싶었다. 애초에 맨해튼에서 지내게 된 것이 트루디의 생떼였으니, 침대에 관한 로키의 생떼 정도는 당연히 들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거실의 소파에서 트루디가 자는 게 가장 괜찮은 결론이라는 그녀의 말을 듣고선 로키는 선심을 쓰듯 자신의 옆자리를 양보했다.

물론 당황한 트루디가 30번쯤 거절했다. 그러다가 결국엔 로키가 ‘내 옆자리에서 자는 게 싫은 거냐’며 은근하게 속삭인 탓에 거의 반쯤 미쳐서는 로키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트루디가 너무 기뻐서 당황하기 전에 ‘그냥 잠만 같이 자는 거야’라고 로키가 못을 박긴 했지만.

그 일이 있은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간다. 그 말 그대로 로키는 정말로 잠만 잤다. 처음엔 트루디의 잠버릇에 꽤나 성질을 부렸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알아서 넘어간다. 로키와 한 침대에서 잔다는 설렘에 밤을 새기 일쑤였던 트루디도, 이제는 침대에 눕자마자 잠에 들 자신이 있다. 누군가 둘을 본다면 답답하겠지만, 그래도 둘은 그게 편했다. 로키를 너무 좋아하는 트루디는 로키가 좋다면 다 좋았고, 로키는 원래부터 자기 마음대로 지냈으니 둘은 전혀 불편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로키가 키스했다. 트루디가 로키를 좋아하던 몇 년 동안 싱겁게 웃기만 하던 로키가 드디어 트루디에게 다가왔다. 그동안 몇 번쯤 장난 같은 고백을 하기도 했고, 언제나 좋아하는 티를 내고 다니던 트루디에게도 이 상황은 당혹스러웠다. 물론 언젠가 로키가 자신의 마음을 받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다.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닌 오늘 말이다. 침대에 누워 로키의 숨소리를 듣던 트루디는 겁이 났다. 이제 두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걸까? 트루디는 여전히 로키를 좋아할 것이다. 그건 변하지 않을 테지만 어느 날 갑자기 로키도 트루디를 좋아하게 되어버리면, 그렇게 되면 모든 게 변할 것이다.

트루디는 겁이 났지만 로키가 옆에 있어준다면 어쨌든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로키는 몇 천 년을 사는 신이라서, 내일 당장 트루디를 떠날 일은 없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그러자트루디는 긴장이 스르르 풀리면서 편하게 잠에 들었다.

 

그 날 밤, 트루디는 산타에게 연애 상담을 하는 꿈을 꿨다. 산타 할아버지, 로키가 저에게 키스했어요. 이제 로키에게 프러포즈해도 될까요? 어떡하죠? 산타는 허허허 웃으면서 트루디에게 선물로 미슬토 한 다발을 안겨주었다. 크리스마스에는 온 세상에 미슬토가 가득하지. 산타는 천장을 가리켰다. 천장을 올려다 본 트루디는 수북히 반짝거리는 미슬토를 보며 당황했다. 저기, 그럼 저 산타 할아버지랑 키스해야 해요? 그리고 트루디는 깨어났다.

 

*       *       *

 

그래서 결국은 물고기들에게 하소연하는 상황까지 왔다. 트루디는 조금 시무룩했고, 그보다 더 조금 억울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조금 화가 나기도 했다. 물고기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미슬토 아래에 선다고 해도, 로키가 다시 키스해 주지 않을 수도 있잖아.”

트루디는 소파에 앉아 어항을 들여다보며 다시 혼잣말을 시작했다.

“들어봐, 내 계획은 아파트 천장을 미슬토로 도배하는 거야! 로키랑 내가 어디에 있어도 그 위에 미슬토가 있게끔 말이지. 뭐,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는 당연히 해야지. 아, 집 안에도 물론! 제일 좋은 건 로키에게 와인을 사오라고 한 다음에 미슬토를 붙이는 건데, 일단 집 안을 끝내면 그 다음엔 엘리베이터, 그 다음엔 계단이랑 플로어! 우리 둘은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맞으면서 미슬토를 올려다보는 거지. 그리고…….”

물고기들에게 계획을 털어놓던 트루디는 결심이라도 했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선 아파트 밖으로 향했다. 해가 지면 계획을 실행에 옮길 시간이 없게 되어버린다. 모르긴 몰라도 일단 준비는 해놓자! 로키는 외출할 일이 없다고 했으니 계속 집 안에 있을 것이다. 트루디는 무작정 근처 인테리어 가게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남아있는 모든 미슬토를 결제했다. 하이스쿨 시절 파티 홀을 꾸밀 때도 이렇게 많은 미슬토를 산적은 없었는데……. 트루디는 경악할 만한 영수증을 기세 좋게 북북 찢어버리고는 -자, 이제 환불도 못 한다- 쇼핑백을 가득 들고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양 손에 가득한 쇼핑백을 지하 주차장에 숨겨두고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집에 돌아갔다.

와인을 깜빡했는데 로키가 사다주지 않을래요? 아니면 로키가 칠면조 요리 해줄래요? 고민하던 로키는 역시나 살짝 툴툴거리며 전자를 택했다. 코트를 입은 로키가 아파트 밖으로 나서는 것을 확인한 트루디는 심호흡을 하며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는 지하주차장으로 달려갔다.

 

한 시간 남짓이 지나자 1층 플로어, 엘리베이터, 복도, 현관, 거실의 천장은 온통 미슬토 천지였다. 로키가 와인을 사러 나간 한 시간 동안 트루디는 결국 아파트 천장을 미슬토로 도배해버렸다. -다행이도 미슬토는 양면 접착테이프로 사용하는 것이라 천장으로 던지기만 하면 붙었다- 한 번의 키스로 로키에게 굴복할 바에야, 여러 번의 키스로 갈 때 까지 가보겠다. 뭐, 트루디가 내린 나름의 결론이었다.

물론 로키가 순순히 키스해 줄 거란 보장은 없었다. 그저 귀여운 크리스마스의 장난으로 넘어갈 수도 있을 테고. 하지만 트루디는 로키에게 말하고 싶었다. 만약 로키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키스를 해준다면, 그게 트루디라면. 아주 짧은 트루디의 100년 동안 로키가 옆에 있다면, 트루디가 사라진 후 로키가 후회하지 않을 거라면. 그러면 그 100년 동안 5천 년의 사랑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어차피 둘은 실컷 아팠다. 그러니까 둘 다 조금 더 아프고 상처받을 자신이 있다면 그걸 잊어버릴 만큼의 행복한 순간들을 만들어보지 않겠느냐고. 그러니까 지금보다 조금은 더 서로를 좋아해보지 않겠느냐고.

로키가 받아들여도, 거절해도, 어떻게 된다고 해도 좋았다. 트루디는 겁나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어도 로키가 조금 더 옆에 있어줄 거란 달콤한 확신이 있었다.

 

*       *       *

 

와인을 사러 밖으로 나온 로키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북적거리는 인파에 짜증이 났다. 하지만 그는 곧 짜증을 내는 것도 잊고서 와인 가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가 짜증을 잊은 이유는 다름 아닌 트루디 때문이었다. (물론 이 짜증의 원인 또한 그녀이긴 했지만.)

셉터를 찾아 지구로 돌아와 허탕을 친 로키가 아스가르드로 돌아가지 않은 건 단순한 변덕이었다. 5월이 끝날 무렵, 로키는 셉터의 마인드 젬이 누군가의 손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고는 결국 셉터를 되찾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면 아스가르드로 돌아갈 때였지만, 로키는 마인드 젬의 동태를 살펴야 한단 합리화로 이곳에 남았다. 뭐, 마침 지루하고 평화로운 미드가르드 생활이 생각보다 즐겁기도 했고, 골머리 앓는 왕의 일로 지쳐있기도 했었다. 자신을 따르는 작은 인간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는 것도 나름 재밌었고, 그 인간을 놀리며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 시간이 이제 겨우 1년이 지났을 뿐인데. 그런데도 로키는 어쩐지 오랜 시간을 이렇게 살아왔다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시내를 향해 걷던 로키는 빨갛고 반짝거리는 도시를 둘러보았다. 로키는 문득 아스가르드를 떠올렸다. 아스가르드에도 축제는 많았고, 당연히 이보다 더 성대하고 큰 장식도 많았다. 로키의 기준으로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작은 도시가 반짝거리는 것을 트루디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떠올리자 헛웃음이 나왔다. 트루디는 이것보다 더 크고 반짝이는 왕국을 보면 얼마나 더 좋아할까. 얼마나 더 꺅꺅거리고, 로키를 향해 흥분해선 얼굴을 붉힐까. 쓰잘데기 없는 상상이지만 걷는 동안 로키는 그 상상에 푹 빠졌다. 덕분에 그는 와인 가게를 두 블록이나 지나쳤다.

왔던 길을 되돌아와서 와인 가게에 들어간 로키는 항상 마시던 와인이 동났다는 걸 알고는 약간 실망했다. 적당히 달콤하고 기분 좋은 과일향이 나서 로키도, 트루디도 잘 마실 수 있는 유의 와인이었다. 로키는 점원에게 그것과 비슷한 와인이 없는지 물었지만, 연인들의 축제인 크리스마스를 앞둬서 그런지 적당히 달고 좋은 가격대의 와인은 모두 동난 후였다.

로키는 남아있는 와인들을 하나씩 시음하며 적당한 와인을 찾으려 했다. 이 와인은 너무 드라이했고, 이 와인은 이상한 꽃향기가 났다. 이건 산미가 강했고, 이건 트루디에게 도수가 너무 높았다. 결국 보다 못한 점원이 로키에게 찾는 와인이 있냐고 물어왔다.

“10도 이하의 레드 와인. 달큰하고 과일향이 나는 것. 아니면 화이트 와인도 상관없어.”

“연인분이랑 같이 마실건가봐요?”

로키가 의아하단 얼굴로 눈썹을 으쓱이자 점원이 덧붙였다.

“평소엔 여러 종류의 와인을 사가시면서, 낮은 도수의 달콤한 와인을 사실 때면 항상 기뻐 보이시거든요.”

그리고서 점원은 약간 가격대가 있지만, 로키와 트루디에게 알맞은 와인을 몰래 꺼내주었다. 로키는 다른 말없이 그 와인을 샀다. 아까 점원의 말에 딱히 부정을 하지 않아서 그런지, 사은품으로 와인 잔 두 개를 넣어줬다. 점원은 예쁜 빨간 리본으로 포장한 쇼핑백을 건네고는 슬쩍 웃었다. 로키는 그 웃음의 의미를 해석하는 대신 눈이 거세진 거리로 나왔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보니, 왜 굳이 도수가 낮고 달콤한 와인을 샀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주로 와인을 마시는 건 로키고, 트루디에게 너무 단 와인은 위험하다. 트루디는 달콤한 거면 뭐든 많이 먹으려고 하니까. 그 생각을 하니 다시 와인 가게로 돌아갈까 싶었지만 결국엔 귀찮아서 관뒀다.

돌아오는 길에도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로키는 짜증을 내지 않았다. 가게에서의 점원의 말이 신경 쓰여 온통 정신이 팔렸기 때문이었다. 정말 로키가 달고 낮은 도수의 와인을 살 때면 기쁜 티를 냈던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로키가 자신의 와인 취향을 트루디에게 맞춰주던 건 언제부터였지? 로키가 언제부터 트루디를 고려하게 됐지? 트루디가 늦으면 신경이 쓰이던 건? 트루디가 잠결에 다른 남자의 이름을 부르는 게 찝찝하던 건? 아홉 세계의 왕인 로키가 트루디의 와인 심부름을 하게 된 건 또 언제부터였지? 그러게, 그런데 또 며칠 전엔 왜 트루디에게 키스했지?

 

더 이상한 건 로키가 그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은 게 즐거웠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로키는 트루디와 함께 단 와인을 마시는 게 즐거웠고, 트루디가 일찍 들어오는 게 즐거웠고, 트루디가 잠결에 로키의 이름을 부르는 게 즐거웠다. 그리고 트루디에게 키스하는 게 즐거웠다.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눈이 내리는 맨해튼 거리엔 사람이 많았다. 반짝이는 전구와 지나치게 행복한 캐롤도. 그 거리를 걸어 아파트로 돌아오는 내내 로키는 자신이 들떠 있다는 걸, 가능하다면 계속 들떠있고 싶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한 인간 때문에.

 

*       *       *

 

와인이 담긴 쇼핑백을 현관에 내려둔 로키는 미슬토로 가득한 집안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아파트의 입구부터 반짝이 가루가 가득하더니. 그는 곧 미슬토 아래에 선 두 남녀는 키스를 한다는……. 쓸 데 없는 장난이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짜잔-! 이르지만 메리 크리스마스!”

“천장은 왜 저래. 심부름 보내놓고 겨우 이거 한 거야?”

“겨우 이거라뇨! 미슬토 아래에서 키스하는 건 인류의 오랜 전통이라고요!”

산타 모자를 쓰고 로키를 맞이한 트루디는 당당하게 허리에 손을 얹고선 자신의 작품을 자랑했다. 완전 빈틈없고, 완벽하죠? 트루디는 칭찬을 바라는 아이처럼 설레했다. 그 모습을 보며 현관에 서서 잠시 뚱하게 있던 로키는 결국은 집 안으로 들어와 테이블 위에 와인을 올려뒀다.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트루디가 신경 쓰였지만 그는 천천히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쳤다.

“왜, 저번 키스가 아쉬웠어?”

“뭐, 뭐예요! 그런 거 물어보면 실례예요!”

“그럼 그 이전엔 키스해본 적 없어?”

“아……. 있어요.”

“흠, 언제? 어디서? 누구랑?”

“고등학교 프롬 때, 나무 뒤에서, 파트너랑요.”

“나 이외의 다른 남자랑 키스를 했단 말이지.”

트루디는 여전히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코트를 정리한 뒤 뒤돌아 트루디를 내려다 본 로키는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산타 모자를 잡아당겼다. 그런 걸 대놓고 말하는 건 뭐야. 로키의 찌푸린 얼굴에 화들짝 놀란 트루디가 뒤로 살짝 물러났고, 이를 놓칠 리 없는 로키가 다시금 트루디의 앞으로 바싹 다가갔다.

“그, 그땐 로키가 저한테 관심 없었잖아요!?”

“그래도 그렇지.”

자기가 먼저 시작해놓고 슬슬 뒷걸음질 치던 트루디는 어느새 등에 닿은 창문의 시원한 느낌에 가볍게 놀랐다. 창틀에 걸터앉은 트루디가 바로 앞의 로키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항복이에요. 어색하게 웃은 트루디가 양 손을 드는 제스처를 취했다. 우리 몇 걸음 걸었지? 로키가 물었다. 잘은 몰라요, 대충 열다섯 걸음? 트루디가 대답했다. 미슬토로 도배된 천장을 보며 한숨을 내쉰 로키가 조그맣게 웃었다.

“내가 이런 미드가르드의 장난에 어울려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게다가 누구는 겨우 한, 두 번의 키스도 감당하지 못하는 어린애면서 말이지.”

“그러니까, 이건, 로키가, 그, 좀, 익숙하게, 만들어, 줬으면, 좋겠는, 데요.”

떨리는 손을 꼬옥 쥔 트루디가 어색하게 웃었고, ‘내가 왜?’ 라고 대답할 것 같은 표정으로 트루디를 바라보던 로키는 기분이 좋은지 장난스레 웃었다. 그리고는 트루디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며 차가운 입김을 후, 불었다. 깜짝 놀란 트루디가 어깨를 으쓱이자 로키가 말했다.

“그것보다, 할 말이 있어.”

“뭔데요?”

차가운 바깥 공기를 마시며 돌아온 로키가 트루디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작은 미드가르드의 도시에서, 작은 아파트로 돌아오는 겨우 20분 동안, 로키는 그 어느 때보다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을 모르는 트루디는 자신의 계획이 성공한 줄 알고 긴장했고, 로키는 자신이 깨달은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로키가 말했다.

“내가 다시 널 찾아왔을 때 말했지. 잠시 이곳에 머무르겠다고. 하지만 네가 그렇게나 나를 좋아한다면, 아주 조금은 더 있어줄 수도 있어.”

로키의 말에, 트루디는 로키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지만 그를 처음 봤을 때 남들과는 다른 그의 모습을 봤던 것 같다.

“귀찮은 인간들의 기념일도 챙겨줄게.”

맨해튼 시내를 벗어나려고 달리는 사람들을 뒤쫓아 가다가 그를 처음 봤다. 이상한 옷차림의 사람이 혼자 시간이 멈춘 듯 서있었다. 비명소리와 폭음이 가득한 맨해튼을 올려다보던 그가 슬프게 웃는 모습을 봤었다. 주위는 그렇게 시끄러운데 그에게 뭔가 한 마디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만약에 운명이란 게 있다면, 그 시간 그 장소에 분명 있었다.

“로키.”

가던 길을 따라가면 시민들을 대피시키는 소방차가 있었을 거다. 하지만 트루디는 더 이상 달리지 않았다. 무서웠고, 다리가 풀릴 것 같았지만 그 남자를 두고 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같이 도망칠래요? 처음 보는 남자에게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물어봤더니 남자는 매섭게 째려봤다.

“그런데 너도 알겠지만 내가 사고 친 게 많아서, 계속 같이 지내려면 갑자기 도망칠 일이 생길지도 몰라.”

그리고 헤어진 다음엔 어떻게 만났더라? 트루디는 엉망이 된 맨해튼을 떠올렸다. 그곳에서 살아 돌아온 후로 잊을 수 없는 남자의 얼굴을 계속 간직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러다가 둘은 어느 날 아직 덜 고쳐진 맨해튼 구석의 허름한 공원에서……. 아, 소중한 과거를 떠올리던 트루디는 둘이 어떻게 만났는지 보다는 결국은 만났다는 게 중요하다고 결론 내렸다. 트루디가 추억을 더듬는 동안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던 로키가 문득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그 땐 다 버리고 같이 도망쳐야 하는데. 어쩔래? 그래도 좋아?”

물론 -약간 한눈팔던- 트루디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기뻐하며 대답했다. 왜냐하면 그건 로키의-

“저 도망치는 거 되게 좋아해요.”

고백이니까.

아, 저도 할 말 있어요.”

“뭔데?”

트루디는 자신이 너무 기뻐서 입이 떨어지지 않을 거란 걸 알았다. 만약 로키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키스를 해준다면, 그게 트루디라면. 아주 짧은 트루디의 100년 동안 로키가 옆에 있다면, 트루디가 사라진 후 로키가 후회하지 않을 거라면. 그러면 그 100년 동안 5천 년의 사랑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어차피 둘은 실컷 아팠다. 그러니까 둘 다 조금 더 아프고 상처받을 자신이 있다면 그걸 잊어버릴 만큼의 행복한 순간들을 만들어보지 않겠느냐고. 그러니까 지금보다 조금은 더 서로를 좋아해보지 않겠느냐고. 이 모든 말을 하지 못하리란 걸 알았다.

그래서 그냥 짧게 요약했다.

“내일 시간나면 저랑 결혼할래요?”

로키는 잠깐 고민하더니 답했다.

“……벌써부터 결혼은 좀 그렇고, 일단 키스부터 하고 생각해보지.”

“에? 그치만 방금 로키 저한테 고백한 거 아니었어요? 잠깐, 아, 아니 그럼 사귀는 건 어때요??”

“키스부터.”

로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정말요? 트루디의 대답에, 로키는 대답대신 주먹을 쥔 트루디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당황한 트루디의 손이 허둥대는 걸 놓치지 않고는 자연스레 파고들었다. 깍지를 낀 로키의 손이 물기로 촉촉한 창문에 맞닿았다. 밖엔 눈이, 아니면 크리스마스가 오고 있었다. 열다섯 걸음이랬나? 로키가 입으로 되뇌자 트루디가 크게 눈을 깜빡였다. 제법 각오한 표정의 트루디가 로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키스는 꼭 입에만 하는 건 아니잖아.”

그의 말에 바싹 긴장한 트루디를 보던 로키는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천장에 남아있는 미슬토는 많았다. 로키는 속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하며 하나,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둘, 그 다음은 눈꺼풀. 셋, 그 다음은 코. 넷, 다섯, 그 다음은 두 뺨. 여섯, 그 다음은 입. 일곱, 그 다음은…….

 

 

 

 

 

Posted by Dreamin stellar
2016. 1. 1. 20:50

 

 





::돗님, 리호님과 함께하는 드림버스의 글입니다

::오리주가 등장합니다

​::드림 전력에 자유 주제로 참여한 글입니다



알콜향 새벽과 커피향 아침​



 

   완전한 겨울. 다다음 주면 크리스마스였다. 거리에는 슬슬 눈이 쌓이기 시작했고, 캐롤도 흘러나왔다. 연말을 앞두고 방학을 맞은 트루디는 새벽이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와선 침대 위로 바로 쓰러졌다. 그런 트루디를 기다리며 밤새 자다 깨길 반복한 로키는 침대 위로 쓰러지는 물컹한 느낌에 눈을 떴다. 새벽 네 시. 두꺼운 코트로 빵빵해진 트루디가 쓰러져서 잠들어있었다. 왜 이제 들어왔냐, 옷은 좀 갈아입고 자라. 트루디에게 잔소리를 하고 싶었지만, 트루디가 거하게 취하기도 했거니와 이미 잠든 탓에 소용없는 일이었다. 결국 로키는 트루디를 대신해 그녀의 더플코트를 벗기고, 가디건과 스웨터도 벗겼다. 안경도 침대 옆 테이블에 올려두고……. 얇은 민소매 한 장과 겨울용 청바지를 입은 트루디는 로키가 옷을 벗기는 동안에도 침대에 누워 알아듣지도 못할 외계어 잠꼬대를 하며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트루디 때문에 잠시 깼던 로키도 시원한 차림의 트루디를 침대로 밀어 넣고서 다시금 잠에 들었다. 아니 잠에 들려고 했다. 트루디가, 잠결에 몸을 부비며 로키의 품안으로 들어오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트루디의 잠버릇이 원래 이런 건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말로는 뭔가 껴안아야 더 잠이 잘 온다는 거였다. 예를 들면 평소에 안고 자는 기다란 무민 인형 같은 것. 애석하지만 그 인형은 지금 세탁기 속에 있다.

   트루디는 로키를 무민 인형 대용품쯤으로 생각하는 듯 했다. 로키의 기다란 팔을 꼬옥 안더니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애를 써서 로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쯤 되면 정말 잠든 게 맞는지, 술김에 말도 안 되는 애교를 부리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갔지만 로키는 괜히 시끄럽게 소리를 내는 대신 그녀를 얌전히 떼어냈다. 방금 전까지 밖에 있었는데도, 트루디는 따뜻했다. 달큰한 술 냄새가 트루디의 머리에 배어있었다. 새벽 늦게 들어온다는 말만 했지, 술을 마신다는 말은 없었는데. 깨어나면 어떤 말로 괴롭혀줘야 좋을까. 로키는 괘씸한 마음에 몇 번이나 트루디를 밀쳐냈지만 트루디는 오늘따라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로키가 신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마지막으로 트루디를 떼어내려는 찰나, 로키의 팔꿈치에 코를 박은 트루디는 작게 낑낑대며 좀 더 올라와 로키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색색이는 트루디의 숨소리가 바로 밑에서 들려왔다. 로키는 트루디를 떼어내지 않고 잠시 그대로 있었다. 자신의 목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물론 로키는 곧 진정했다. 그리고 로키는 이번에는 따뜻한 그녀를 떼어내는 대신 트루디가 깔고 누운 자신의 팔을 빼내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길고 치렁치렁한 머리가 로키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시원한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로키는 머리가 엉키지 않도록 정리한 뒤 테이블 위의 머리끈으로 그것들을 정리해 묶었다. 그리곤 추위 때문인지 알코올 때문인지 코가 새빨간 트루디를 내려다보았다. 빨간 코의 트루디가 로키의 어깨와 목덜미에 얼굴을 대고 얼굴을 비볐다. 체리향이 나는 립밤으로 촉촉한 그녀의 입술이 쇄골 언저리를 지나치며 향을 뿜었다. 로키는 잠든 여성에게 부적절한 스킨십을 하는 것이 신사의 도리가 아니란 것쯤은 알았지만, 무릇 남자들이 어째서 잠든 여성에게 그런 것들을 시도하는 것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고 느꼈다. 하지만 로키는 잠든 트루디를 결국은 옆으로 끌어내리며 그녀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제발 좀 얌전히 잠들어라. 그렇게 생각하며 로키는 등을 돌렸다.

 

   트루디는 얌전히 잠들었나 싶더니, 다시 로키를 찾아 꼼지락거렸다. 막 잠에 들려던 로키는 슬슬 귀찮아진 상태라서 그것을 모른 체 내버려두었다. 이불을 끌어당기려 꼼질거리던 트루디는 판판한 로키의 등에 닿자 그의 등을 두드리며 중얼댔다.

   “저기요……. 누구신지 모르겠는데 여기 로키 자리거든요- 제 옆에 자면 안 돼요…….”

   “저기요-? 이 이불도 저랑 로키 거거든요…….”

   “……그쪽도 취했어요??”

   하, 그 순간 로키는 작게 웃었다. 취한 건 너겠지. 아무래도 곱게 잠들기는 글렀다. 왜냐하면 로키에게 좋은 장난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굳이 잠들기를 관두고 등 뒤의 트루디에게 고약한 장난을 걸기 시작했다.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달링. 우리 결혼했잖아?”

   “그러니까… 댁이 누구신데…….”

   “…제임스.”

   “지미? 너 나랑 결혼했어!?”

   적당히 둘러댄 이름이 그녀의 입에서 되풀이되자 약간은 화가 났지만, 로키는 이 지독한 장난에 한껏 재미가 든 상태였다. 그는 훌륭히 ‘지미’를 연기하며 취한 트루디를 놀렸다. 우린 눈이 내리는 미술관에서 만났고, 내가 작년에 작은 다이아 반지로 프러포즈 했고, 넌 그걸 받고 펑펑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그 다음엔 시애틀 근처의 작은 아파트를 얻었고, 허니 문은 하와이에 다녀왔고, 재미도 없고 평범한 일상들을 블라블라.

   “아, 애도 있어.”

   “뭐? 아들? 아니면 딸?”

   “아들, 딸. 쌍둥이.”

   “쌍둥이?? 아니… 내 로키는 어쩌고……?”

   “아까부터 로키라니, 도대체 그 사람이 누구기에 그렇게 찾아대는 거야.”

   “어… 로키는, 그러니까 내……. 나의…….”

 

   등을 돌린 채 눈을 감고 바보같은 말들을 속삭이던 로키는 뒤가 조용해지자 고개를 돌렸다. 흐리멍덩한 눈으로 반쯤 잠든 트루디가 더 바보같이 울고 있었다.

   “로키는 나의…….”

   그것도 아까부터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그녀는 뭐가 그렇게 속상한지 -아니 대충은 알겠지만- 로키가 그녀를 바라보는 줄도 모른 채 더욱 크게 울기 시작했다. 그녀가 꺽꺽대며 울 때 마다 시큰한 레몬 향이나 알콜 향이 뿜어 나왔다.

   “로키가, 로키를… 그러니까 로키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인데……. 그래서, 로키는… 나의 소중한…….”

   “…….”

   “…사실 연인이었으면 좋겠어. 아니면 남편도 좋아.”

   울면서 하는 말 치곤 당돌했다. 아이같이 소리 내어 우는 트루디가 왜 못나 보이지 않는 걸까. 로키는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약간 짜증나긴 하지만 그것은 트루디가 울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니면 그냥 옆에 있기만 해도 돼.”

   로키는 하는 수 없이 작정하고 울기 시작한 트루디를 일으켜서 등을 다독여주었다. 겨우 어제 빨았던 베개나 이불을 적실 수는 없었다. 폭신한 침대 위에서 그녀는 전에 없을 만큼 크게 울었다. 원체 우는 일이 없는 트루디가, 로키가 본 것 중에 가장 크게 우는 것 같았다. 로키는 가슴 구석 어딘가가 답답했다. 묵직하고, 찐득한 진흙처럼 철벅거렸다. 분명 시작은 장난이었는데 찝찝한 새벽이 되어버렸다. 무엇보다도 내일 아침 트루디가 깨어나면 술에 취한 기억은 모두 잊어버리는 그녀가 지금의 기억도 잊을 거라는 게……. 차라리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녀가 지금을 기억하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르니까.

   “지미. 우리 이혼해.”

   “트루디?”

   “미안해, 미안. 지미. 정말 미안……. 나 로키한테 고백해야해.”

   로키는 눈물로 가득 찬 트루디의 눈가를 소매로 닦아주었다. 그녀는 술에 취한데다 안경도 벗고 있어서 아직도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를 모르고 있다.

   “그치만…… 로키는 내 전부야.”

   아, 취소. 방금 전의 말은 취소다. 그녀가 지금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 가능하다면 평생 기억했으면 좋겠다. 로키는 오랜만에 자신이 따뜻하고 먹먹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도 자신보다 두 뼘은 작고 1000살쯤 더 어린 인간에게. 문득 생각해보니 누구에게서도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오딘? 형제였던 토르? 하물며 자신을 가장 아껴주던 어머니인 프리가에게서도 그런 말은 듣지 못했다. 전부라니. 그런 건 거짓말이거나 깨닫지 못하는 착각인 쪽이 더 가능성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트루디의 눈은……. 모르겠다. 로키는 잠시 멍한 채로 생각을 멈췄다. 확실한 건 로키가 이제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그래. 그럼 이혼하자.”

   “지미, 정말 미안… 내가 무슨 생각으로 너랑 결혼한 건지, 아니, 아니 물론 지미는 좋은 사람이지. 착하고, 싹싹하고, 눈도 예쁘고.”

   “그만, 그건 됐고. 대신에….”

   로키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허공을 쏘아보던 트루디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안경이 없어서 그런지 트루디는 인상을 쓰며 눈앞의 물체를 분간하려 애썼다. 지미? 트루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로키를 바라봤다.

   “이혼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키스해도 돼?”

   “……아, 응.”

   로키는 자신이 알지도 못하지만 착하고 싹싹하고 눈도 예쁜 지미라는 남자에게, 흔쾌히… 까지는 아니더라도 키스를 허락한 트루디가 약간은 괘씸했다. 하지만 뭐 어떻겠는가. 지금은 로키가 지미였다. 트루디는 지미에게 미안하다, 따위의 쓸데없는 말을 속삭이며 눈을 감았고 지미는 그녀의 체리맛 입술에 키스했다. 그 달콤한 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혼 전의 마지막 키스보다는 결혼 직전의 달콤한 키스에 더 가까웠다.

 

 

*      *      *

 

 

   “머리가 깨질 것 같아요.”

   냉수를 네 잔째 마시며 싱크대에 얼굴을 박은 트루디가 말했다. 주말 오후가 되어서야 깨어난 트루디는 거의 죽어가는 소리를 내며 집안을 좀비처럼 돌아다녔다.

   “그러기에 새벽까지 술을 마신 네 잘못이지.”

   “으윽, 그치만 취직한 지미가 계산한다고 큰소리를 쳐서……. 거기 비싼 칵테일이 잔뜩 있었다고요? 알콜 도수 낮은 걸로 다섯 잔, 아니 딱 열 잔만 마시려고 했는데.”

   “그래도 용케 집은 찾아왔네.”

   “지미가 택시 태워줬던가, 그럴걸요?”

   지미, 지미, 그놈의 지미. 로키는 불쾌하게 익숙한 이름을 들으며 우아하게 소파에 앉아 우아하게 신문을 구겼다. 트루디는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다. 어젯밤의 이혼 놀이나, 자기의 전부가 로키라던 시시한 고백이나, 단 내가 나던 키스 같은 것도. 물론 예상치 못했던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무사히 집에 와서 다행이에요. 좀 이상한 꿈을 꾸긴 했지만요. 꿈에 로키가 나왔던 것도 같은데.”

   “어떤 꿈인데?”

   “아, 그건……. 부끄러워서 비밀.”

   “나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비밀이라니, 우리가 언제 이렇게 서운한 사이가 됐어?”

   “로, 로, 로키랑 제가 어떤 사이인데요?”

   “글쎄, 내가 너의 전부인 사이.”

   원래는 슬쩍 떠보려던 건데, 그의 말에 다섯 번째 냉수를 마시던 그녀가 물을 뿜었다. 트루디는 한 1분 쯤 가만히 로키를 바라보더니 떨어트린 컵을 간신히 주워 싱크대에 담으며 그를 바라봤다. 트루디가 어젯밤의 일을 완전히 잊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꿈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만. 사실은 어제의 일이 꿈이 아니었고, 어제의 지미가 지미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면 트루디는 어떤 표정으로 로키를 바라볼까.

   “……로키?”

   “그래.”

   “……나 지미랑 이혼 한 거 알아요?”

   “결혼한 적도 없어.”

   “꿈 아니에요?”

   “아니야.”

   “그럼, 어제, 그거, 로키? 나, …로키한테 ……고백.”

   “했어.”

   “대… 대답은….”

   “비밀이야.”

   그리고 로키는 사뿐히 신문을 접었다. 그는 신문을 읽는 대신 보기 좋게 새빨개진 얼굴의 트루디를 보기 위해 몸을 틀었다. 과연, 그녀는 홍당무가 되어서 주방 구석의 벽에 쓰러지다시피 기대있었다. 그, 그럼. 키스는? 그녀가 두 뺨을 감싸며 새어나오려는 비명을 막았다. 뭐, 못할 일을 한 건 아니지 않나? 왜냐하면 트루디의 전부는 로키고 -그녀 입으로도 인정했고- 로키의 전부, 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의 일부도 트루디였으니까. 로키는 어느새 그녀와 로키가 서로의 일부를 차지하게 되었다면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로키를 자신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다시 나타나리란 보장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로키가 기억하는 한 어제의 키스는 썩 나쁘지 않았으니까.

   키스도 했다고 대답할까? 로키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무슨 대답을 할지는 정하지 않았다. 별로 중요한 대답도 아니었다. 그녀가 어젯밤의 일을 기억한다는 게 더 중요했다. 로키는 그녀의 마지막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다 읽은 신문을 소파에 던져두고 아직도 주방에서 로키를 바라보며 옴짝달싹 못하는 트루디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녀가 뭔가 더 쓸데없는 말을 하기 전에 다시 키스했다. 트루디는 처음엔 흠칫 놀라더니 이내 눈을 감고 로키의 팔을 잡았고, 로키는 주방 벽에 기대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방 전체에 커피포트가 끓는 소리가 들리고 쌉싸래한 커피향이 둘을 휘감았다. 시끄러워. 그렇게 생각한 로키는 정신을 못 차리는 트루디를 보다가 살짝 고개를 돌려선 요란하게 끓고 있던 포트의 전원을 껐다. 그리고는 다시금 하던 일에 집중했다.

 

 

 

Posted by Dreamin stellar
2015. 11. 25. 19:03

 

 

 

 

::리호님, 돗님과 함께하는 드림버스의 글입니다

::드림주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두 사람의 주말



   밤새 아주 길고 복잡한 꿈을 꿨던 것 같다. 침대에서 스르르 눈을 뜬 트루디는 이불을 좀 더 끌어 모았다. 옆이 허전했다. 로키는 진즉에 일어나서 밖에 있는 모양이다. 어느새 부턴가 아침 공기가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하고 싶다가도 아직 따뜻한 침대에서 뒹굴 거리고 싶었다. 이불을 돌돌 말아서 열을 감쌌다. 폭신폭신한 이불속에서 트루디는 조금 더 잤다.

   로키가 없어서 더 넓어진 침대 위를 굴렀다. 팔을 오른쪽으로 약간 틀면 더 편한 것 같다가, 허리를 반쯤 접으면 더 잠이 잘 올 것 같기도 했다. 결국은 적당히 옆으로 누워서 로키의 베개를 끌어안았다. 시간을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이 상태의 기분이 너무나 좋았다. 마음만 먹으면 앞으로 세 시간은 더 잘 수 있을 것 같았고. 게다가……. 오늘은 어쩐지 늦잠을 자고 싶은 날이었다. 단편적인 장면만 기억나서 희미해 진 꿈이었지만, 지금 잠들면 뒷내용을 이어서 꿀 수 있을 것 같았다. 꿈속에 로키가 나왔었던 것 같다. 아, 로키?

   눈을 감고 하품을 하던 트루디가 기지개를 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반쯤은 다른 세상에 가있는 정신으로 이불도 정리하고, 부스스한 머리도 -나름- 깔끔하게 묶었다. 지난 밤 침대 옆 테이블에 대충 던져둔 안경도 썼다. 세상이 좀 더 맑아졌다. 트루디는 한 번 더 온 몸을 비틀며 크게 몸을 풀고는 심호흡했다. 시린 맨발을 보슬보슬한 극세사 슬리퍼 속에 넣고, 반팔의 잠옷 위로 가디건도 입었다. 10시가 조금 넘었다. 아, 행복해-. 간만의 주말에다 간만의 늦잠이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먹먹하게 잠긴 목소리지만 신이 나서 외쳤다. 로키는 책장 앞에서 책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건 버릴 거, 이건 다 읽은 거. 이건 다음 권이 필요한 거. 이건 쓰레기. 그는 새로운 달이 시작하기에 앞서 늘 책장을 정리했다. 그가 좋아하는 책들은 언제나 특별 칸에 넣어져 연명했지만 그가 읽고 마음에 들지 않거나 하는 책은 구입한지 일주일이 겨우 된 새 책인데도 꾸준히 헌책방으로 향했다. 트루디는 처음엔 그것이 꽤나 아깝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다 먹은 과자 포장지도 모아둘 거냐”며 그녀를 놀렸기에 조용히 넘어갔다.

   트루디의 아침 인사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주말인데도 전혀 늘어지거나 뒹굴 거리지 않을 것 같은 그는 이젠 놀랍지도 않다는 얼굴로 고개를 까딱여 인사를 받았다.

   “10시 26분?”

   “에헤헤헤…….”

   그가 시계를 보고 되물었다. 트루디는 멋쩍게 웃으며 주방으로 숨었다. 그는 다시금 자신의 일에 집중했다. 겨울이 되기 전에 쓸모없는 책들을 아주 솎아내려는 작정인 것 같았다. 벌써 두 상자가 가득 찼는데도 그는 멈출 줄을 몰랐다. 그사이 시원한 우유를 한 잔 마신 트루디는 컵을 내려놓고 그의 옆을 기웃거렸지만 그는 아주 바쁜 척 굴었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즐거운 것도 아닌 표정으로. 그는 책장을 정리하는 사소한 일에도 적당히 굴 줄을 몰랐다. 로키가 별 말이 없자 근처에 앉아 그를 구경하던 트루디가 가만히 있었던 건 34초였다. 그리고는.

   “오늘 헌책방 가실 거예요? 이 정도 양이면 택시를 부르는 게 좋겠죠? 아니다, 여행 캐리어에 들어가려나? 설마 무거워서 엘리베이터 고장 나진 않겠죠? 저 계단으로는 이거 도저히 못 들어요. 음, 오늘 아침 쌀쌀하죠? 냉장고에 있던 우유 제가 싹 마셔버렸어요. 냉장고 많이 비었던데……. 장 볼까요? 헌책방 가는 김에 우리 외출해요! 아, 밖에 춥지. 슬슬 겨울 옷 꺼내야 하는데……. 로키 겨울 옷 많이 없지 않아요? 로키랑 제 코트 커플로 하나 맞출까요? 아, 아니 뭐 꼭 같은 디자인은 아니어도 되고요……. 그냥 같은 색이기만 해도 좋아요. 그러고 보니 요샌 커플끼리 같은 운동화를 신는 게 유행이래요! 아, 그치만 로키는 운동화가 없지……. 이참에 하나 사버려요? 아… 그래도 안신을 거죠……. 그럼 우리는 구두를 커플로 맞출까요? 겨울에 입을 코트랑 구두랑?”

   “그만.”

   로키가 드디어 고개를 돌려 트루디의 말을 막았다. 시끄럽다는 뜻이었다. 너무 많이 말했나? 입을 쏙 닫은 트루디가 눈치를 보자 그가 얼굴을 찌푸리며 바라봤다.

   “……너 세수 안 했지.”

   눈알을 데록데록 굴리던 트루디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트루디는 로키 옆의 상자들을 현관 근처에 옮겨놓고는 잽싸게 욕실로 도망쳤다. 아아- 부끄러워-!!!!

 

*    *    *

 

   로키는 트루디가 욕실로 들어가는 걸 보고는 다시 책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책장이 반 이상 비어버렸다. 하지만 이 심심한 미드가르드에서 책을 읽거나 가끔 외출하는 것 말고는 다른 소일거리가 없는 그에겐 그것이 좋은 소식이었다. 새 책을 잔뜩 살 수 있으니까.

   헌책방에 들렀다 시내로 나가면 딱 좋게 점심시간일 것 같았다. 지금 예약하면 레스토랑에서 줄을 서지 않아도 되겠지. 사람이 많아서 복잡한 시내는 별로인데. 그녀의 말대로 겨울옷이 얼마 없는 건 사실이다. 옷을 사는 김에 장을 보면? 아무래도 평일엔 장을 보기 힘들겠지. 아니, 정확히는 로키 혼자 장을 보는 건 아직도 어색했고 트루디가 장을 보면 제대로 된 먹을 걸 사오지 않았다. 그는 며칠 전 트루디가 학교에서 돌아온 금요일 저녁의 장바구니를 떠올렸다. 달고, 짜고, 시고, 매운 간식거리들이 종류별로 하나씩. 쓸 데 없이 많은 유제품. 맥주 한 캔. -시음도 안 해본 게 분명한-로키를 위한 와인 한 병. 소스 없이 달랑 사온 파스타 면. 둘이 먹기엔 많은 소고기. 로키는 먹지 않는 초콜릿 맛 시리얼. 딸기. 자몽……. 편식이 있는 그녀였지만 장을 볼 때면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일단 카트에 먹고 싶은 걸 전부 채운 후에 필요 없는 것 한두 개쯤 빼고 나면 완벽하다고 여기는 그녀에게 장보기를 맡길 수는 없었다. 결국 그 날은 밤늦게 다시 슈퍼마켓에 갔고, 문 닫기 직전의 시간이라 너덜너덜한 야채와 통조림을 사곤 걸어서 돌아왔다. 잔소리를 많이 했던 것 같다. 지금이라도 장을 보지 않았으면 당장 내일 뭘 먹을 생각이었냐면서. 그건…… 한 때 지구를 정복하려던 이의 입에서 나온 잔소리치곤 너무 시시했다.

 

   하지만 약간은 부모 같고, 가끔은 간질거리는 동거에 로키는 너무도 익숙해져 있었다. 시내에 나가 심야 영화까지 보면 트루디가 내일도 늦잠을 자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그는 스스로 새삼스레 깨달았다. 이 지루하고 평화로운 지구 생활이 그에게 얼마나 당연해졌는지. 겨우 몇 개월이다. 채 일 년도 되지 않은 미드가르드 생활에 이렇게 빨리 적응할 줄은 그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트루디 이외의 인간들과 말을 섞을 관심도 없었던 그는 어느새 윗집의 키티와 마주치면 그녀의 인사를 받아주고, 아랫집의 유나에게 향이 좋은 원두를 추천받기도 하고, 그 옆의 버키와 눈을 마주쳐도 싸우지 않고……. 뭐, 가끔 토니 스타크를 놀리기도 하면서. 그러면서. 몇 년 전의 끔찍한 맨해튼은 잊고서 그는 너무나 편안하게 지내고 있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나날들…….

   “헌책방 들렀다가 시내 나가면 딱 점심시간이겠어요!”

   세수를 마치고 나온 트루디가 멀리서 말했다. 책장 정리를 멈추고 잠시 사색에 잠겨있던 로키는 정신을 가다듬고는 정리를 마쳤다.

   “나갈 거야?”

   “그래야죠. 오늘 아니면 이 많은 걸 들고 언제 헌책방에……. 아, 로키는 점심 뭐 먹고 싶어요? 슈퍼도 갈 거예요?”

   “뭐, 나간 김에…….”

   “와! 그럼 저번에 갔던 레스토랑 또 갈래요? 상점가랑 가까우니까 바로 옷 사고, 장 보면 되겠어요.”

   “그러던지.”

   “아, 주말이라 사람이 많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예약해.”

   시큰둥하게 서있던 로키가 말하자 트루디는 제법 놀랐다. 진짜 나갈 거예요? 그녀는 아직도 가끔 로키가 얌전하게 굴면 화들짝 놀라곤 했다. 그가 생각해도 정말…… 성질이 많이 죽기는 했다. 그녀는 신이 나서 방방 뛰며 전화기를 들고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빠르게 돌아다녔다. 방을 오가는 그녀는 옷차림이 바뀌고 머리가 마르나 싶더니 어느새 외출 준비를 마쳤다. 그녀는 식당의 창가 자리를 얻은 행운을 로키에게 자랑하면서 엘리베이터를 누르고 돌아왔고 서둘러 지갑을 챙겼다.

   “잠깐 나갔다 왔는데 별로 안 추워요! 걸어갈까요? 상자는 좀 많지만…… 로키가 들면 돼요!”

   “내가?”

   “네! 저도 한 개 들어줄게요, 로키가 두 개 들어요.”

   “나에게 이 무거운 걸 들게 할 거야? 잔인하긴.”

   “로키가 읽은 거잖아요!!!”

   그녀가 상자를 들고 저만치 나가서 현관문을 발로 걸터며 소리쳤다. 빨리 안 오면 예약에 늦어요! 그녀는 오늘 그 레스토랑에서 시즌 메뉴인 빠네 파스타를 팔기 시작했다면서, 빨리 가지 않으면 재료가 동날 거라고 했다. 로키는 그게 뭔진 몰라도 그녀가 저렇게 신나하는 걸 보면 유명한 요리일 거라고 생각하며 상자를 들었다. 아스가르드인인 로키에겐 터무니없이 가벼운 무게였다. 로키가 나오길 기다리며, 현관문이 닫히지 않게 발로 붙잡아두는. 겨우 책 상자 하나를 들고 삐질 거리는 트루디와는 달리. 그는 일부러 더 느긋하게 신발을 신고 현관을 나서며 그녀의 상자도 빼앗아들었다. 그녀가 살짝 놀란 눈으로 로키를 올려다봤다. 그러다가 굳이 자신이 상자를 들겠다고 소란을 피웠다.

   “빨리 안 가면 엘리베이터 내려간다?”

   로키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곤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녀는 재빨리 그를 따라갔다.

   그들은 강가를 따라 헌책방에 갈 것이다. 트루디의 얼굴을 익숙해하는 나이 든 여주인이 그들의 책의 깨끗함에 감탄하며 좋은 값을 매겨줄 것이고, 그들은 짭짤한 현금으로 따뜻한 커피를 사 마실 것이다. 시내 방향으로 걸으며 그들은 아침에 있었던 자잘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웃을 것이고, 레스토랑에선 근처 주민들에게 연인이 아니냐는 오해도 두어 번 받을 것이다. 트루디는 아니라고 하면서 좋아하고, 로키는 딱히 대답하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옷을 좀 구경하다가 로키의 맘에 드는 놀라운 가격의 옷을 사고, 다음 주 내내 먹을 장을 볼 것이다. 그리고는 옷과 장 본 것들은 딜리버리를 맡기고 어느새 저녁을 먹을 것이다. 그렇게 밍기적거리다 어쩌면 심야 영화를 같이 볼 지도 모른다. 영화는 아마 기대했던 것보다 재미있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같이 영화를 보고 나와서 택시를 잡으려고 애쓰다가 결국 걸어서 돌아올 것이다. 집 앞에서 배달된 상자들을 들고 올라가면 현관문을 열고, 형광등을 켜고 외출했다는 것을 알게 될 거고, 그러면 트루디는 전기세 노래를 부르며 슬퍼할 거다. 로키는 냉장고를 채우고, 트루디는 돌아오는 길에 산 케이크를 먹자고 신나할 것이고. 그들은 새벽 1시가 가까이 되어 커피를 마시고 케이크를 먹으며 수다를 떨다가 사이좋게 잠에 들고. 로키는 어쩌면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며 약간은 기분 좋은 하루였다고 되뇌고, 트루디는 옆에서 로키를 보며 헤벌쭉 웃을 것이다. 크고 폭신한 침대에서 둘이 잠이 들면 그들의 주말이 마무리 될 것이고, 어쩌면 트루디는 지각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두 사람의 주말은 행복했다.

 

 

 

 

Posted by Dreamin stellar
2015. 7. 26. 23:54

 

 

네가 없을 때


 

전쟁 같은 아침 기상이 지나고 -로키가 보기에 그건 전쟁 보다는 부산스런 서커스에 가까웠지만, 트루디는 아침 기상을 꼭 전쟁이라고 표현했다- 트루디가 학교로 떠나면 로키는 조용한 거실에서 아침을 먹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트루디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는 컸다. 그건 그녀가 그만큼 존재감 넘치는 타입이라기 보단 그저 로키 옆에 찰싹 달라붙다시피 지내서 그런 것이었지만, 하여간 트루디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는 컸다. 로키는 그 조용하고 공허한 시간이 좋기도 싫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은 싫은 쪽에 좀 더 가까웠다. 트루디가 일어났을 때부터 쿨럭 거리던 하늘은, 트루디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비를 게워내기 시작했다. 가벼운 여름 소나기가 아니었다. 그러보고니 장마가 온다고 했던가. 로키는 TV에서 이상한 비닐 옷을 입고 떠들던 기상캐스터를 떠올렸다. 일주일 내내 장마라는 말을 잘도 웃으며 지껄이던 기상캐스터를 떠올리다 언짢아진 로키는 먹던 샐러드를 싱크대에 내버리곤 가장 안쪽의 방으로 들어갔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온 집안이 축축하고 창밖으로는 빗소리도 들려온다. 로키는 트루디의 귀가 시간까지 집에 처박혀있는 게 싫었다. 이런 날 혼자 있으면 구질구질한 생각들이 따라 나온다. 옆에 소란스런 트루디라도 있으면 정신이 팔려서 좀 덜 할 텐데. 로키는 에어컨의 제습 기능을 최대로 올려놓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제 막 켜져서 시끄럽게 윙윙거리는 에어컨 소리마저 짜증났다. 로키는 눈을 지그시 감고 명상이라도 할까 하다가, 아무것도 안 하는 쪽이 더 귀찮은 생각이 따라 나올 것 같아 거실로 나왔다. 로키는 거실 구석의 전축의 볼륨을 최대로 키워 빗소리를 가리고-아랫집이나 윗집에서 항의가 들어와도 알 바 아니었다-, 창문에 커튼을 쳤다. 거실의 에어컨 제습 기능도 최대로 올린 로키는 소파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얼마 전 트루디가 잔뜩 사온 쓸데없는 철학책 중 하나였다. 로키는 적당히 아무 페이지나 펼쳐 팔랑거리는 척을 했다. 내용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지만, 로키는 머릿속에서 정렬되지 않는 단어들의 나열을 눈으로 쫓아가며 비가 온다는 사실을 잊으려고 노력했다. 적어도 아스가르드, 토르, 프리가, 오딘에 관한 것들은 잊으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럴 수 없었지만-


 

문이 열린 건 그 때였다. 그것도 아주 세차게 열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로키는 시끄러울 정도의 전축의 볼륨을 끄곤 문을 바라봤다. 열린 현관 밖에는 마치 비에 쫄딱 젖은 생쥐 같은 모습을 한 트루디가 헉헉대며 로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수건…….”

옷도, 머리도 비에 범벅이 된 귀신같은 트루디가 그렇게 말하자 로키는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바보 같은 표정을 한 트루디가 현관에서 차마 집으로 들어서질 못하고 -거실을 적시고 싶지 않았나보다- 계속 수건, 수건하고 외쳤다. 로키는 트루디가 수건을 달라고 문장을 완결 짓지 못하고, 급한 마음에 수건이라는 단어만 버벅대며 외치는 모습이 어이가 없을 정도로 웃겼다. 로키가 킥킥대며 웃기 시작하자 트루디는 더욱 당황해선 현관에서 통통대며 화장실에 손을 뻗었다. 트루디의 손끝에 간신히 닫은 화장실 문이 열렸지만, 더 안쪽의 찬장에서 수건을 꺼내긴 힘들어보였다. 낑낑대던 트루디가 그제야 로키의 이름을 불렀다.

“로키! 수건요!”

“알았어, 알았어.”

여전히 킥킥대며 소파에서 일어선 로키는 트루디가 현관에서 쩔쩔맨 지 5분은 지나서야 수건을 꺼내주었다. 왜 트루디가 돌아왔는지, 왜 비를 쫄딱 맞았는지는 몰라도 지금 로키는 이 상황이 꽤나 즐거웠다. 로키가 수건을 건네자 트루디는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수건에 얼굴을 묻었다. 축축한 안경을 닦고 시야가 밝아지자, 트루디는 이번엔 옷을 닦기 시작했다. 에어컨 공기로 가득한 방 안은 제법 추웠다. 트루디는 약간은 파들거리며 치마를 벅벅 문질렀다. 머리부터 먼저 말릴 것이지, 하고 로키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로키는 저도 모르게 수건을 하나 더 꺼내왔다.

“뒤돌아 서.”

“?”

아까운 치마 다 버렸다며 울상이던 트루디가 올려다보자, 로키는 나직이 말했다. 머리 말려야지?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상냥한 말투에 트루디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등을 돌렸다. 로키는 트루디의 길고 검은, 그리고 젖은 머리에 수건을 덮었다. 위에서 부터 수건을 문지르며 머리끝까지 내려오자, 수건은 벌써 축축했다. 빗물. 트루디에게 적셔졌던 빗물이 수건을 타고 로키의 손에도 닿았지만, 로키는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로키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트루디의 머리를 말려주는 게 좋았다. 로키는 그렇게 한참동안 트루디의 긴 머리를 잘 쓰다듬어주며 이 작은 인간이 감기는 걸리지 말길, 하고 기도했다.

“아, 이, 이제 드라이기로 말릴게요…….”

로키의 손길에 한동안 얌전히 있던 트루디는 새빨개진 얼굴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무리 말렸다고 한 들 트루디의 몸에서 떨어지는 빗물들은 어쩔 수 없이 거실을 적셨다. 방 안쪽에선 윙윙거리는 드라이기 소리가 예전 전축 소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빗소리를 감춰주었다. 로키는 난장판이 된 거실을 바라보다가 제 손에 들린 축축한 두 번째 수건을 빨래 통에 던졌다. 제법 귀여운 소란이었다.

 

“갑자기 왜 돌아온 거야? 우산이라면 근처 편의점에서 사도되는데 멍청하게 비에 젖기나 하고 말이지.”

침대에 앉아 머리를 말리던 트루디는 로키의 말에 예? 예? 하고 되묻다가 결국 덜 마른채로 드라이기를 껐다. 로키는 상냥하게도 같은 내용을 세 번이나 말해주었다.

“아, 그게……. 지각해서 택시를 잡으려고 뛰어가는데 갑자기 비가 오지 뭐예요…….”

로키는 비를 맞으며 택시를 부르는 트루디를 상상했다. 그것도 지금 만큼이나 좀 웃긴 것 같았다.

“아무래도 금방 멈출 것 같지 않아서, 근처 편의점에서 우산을 사서 계산하려고 했는데…….”

이미 편의점에 들어서면서부터 쫄딱 젖은 트루디라니, 로키는 트루디가 좀 불쌍하게 보였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편의점 알바분이, 오늘 내내 비가 온다고 하지 뭐예요. 장마가 시작되는 날이라고…….”

장마. 로키는 잊고 있던 사실도 떠올렸다.

“그래서. 로키가 혼자 있다고 생각하니까, 저도 모르게 뛰어와버렸어요…….”

로키는 잠시 생각하는 걸 멈췄다. 대신 로키는 자신을 올려다보며 지금부터 비를 싹 잊게 해줄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가자고, 은근슬쩍 데이트를 신청하는 트루디의 손에서 수건을 빼앗았다. 로키는 대답 대신에 트루디의 얼굴에 수건을 덮었다. 그리고 침대에 앉아있던 트루디가 채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놀란다던가, 비명을 지른다던가- 로키는 트루디의 입 위의 수건에 입을 맞췄다. 축축한 수건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 트루디의 말랑한 입술이 느껴졌다.


 

“머리 제대로 말리고, 영화 보러 나갈 준비 해. 택시 탈거니까 각오하고.”

로키는, 그렇게 말하며 젖은 첫 번째 수건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그 후 한참이 지나서 방안에서 뭔가 기이한 비명소리가 들린 것 같긴 하지만……. 어질러진 거실과 현관은, 나중에 다녀와서 정리하기로 하고, 로키는 가벼운 외투를 걸쳤다. 그리고 계속 생각했다. 방금 전 왜 자신이 트루디에게 키스 -아니면 그 비슷한 것-를 했는지.





Posted by Dreamin stellar
2015. 7. 24. 22:05

 

 


 




즉흥환상곡






“아, 정말 큰일 날 뻔 했어요……. 그렇죠?”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닫은 트루디는 심장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제 앞에는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인 로키가 느긋이 전축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가 긴 손가락으로 바늘을 툭 건드리자, 쇼팽의 즉흥환상곡이 흘러나왔다. 큰 폭풍이 지나간 것 같았다.

 

1시간 전, 평소와 다름없이 플로어의 관상식물에 물을 주고 올라오던 트루디는 4층 아가씨인 키티의 갑작스런 부름에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어째서 자신을 부르는 걸까. 트루디는 분명 새로 이사 왔으니 자기소개라도 하려는 거겠거니, 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4층으로 향했다. 도착한 키티의 집은 상상했던 것보다 넓고 멋졌다. 분명 아래층과 같은 구조일 텐데도 뻥 뚫린 거실은 어쩐지 개운한 느낌마저 들었다. 하여간 트루디는 키티의 안내에 따라 테이블에 앉으며 자신의 윗집에 사는 그녀의 생활을 나름대로 상상해보려 애썼다. 여자 혼자 이 넓은 곳에서 혼자 지낸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하고 생각할 즈음 키티가 말을 꺼냈다. 그 -그러니까 로키-에 관한 걸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고. 당황한 트루디가 어떤 변명으로 잘 빠져나가야 뒷감당이 없을까, 하고 생각할 때 키티가 결정타를 날렸다. 그리고, 키티가 실은 로키의 정체를 아는 쉴드 요원이었다는 말에 거의 얼어붙은 트루디가 울기 직전에 로키가 찾아왔다.

그 후엔 대체적으로 원만한 해결이었다. 로키는 말썽을 피우지 않겠다 약속했고, 키티는 그 약속을 믿어주기로 했다. 트루디는 그저 옆에서 두 사람이 이 아파트 -어쩌면 지구-의 평화를 약속하는 걸 멀뚱히 바라볼 뿐이었다. 뭐, 로키가 키티와 약속의 상징으로 새끼손가락을 걸었을 때엔 조금 부럽긴 했지만……. -그건 아직 트루디도 하지 못한 것이었으니까- 하여간 하마터면 좋아하는 범죄자와의 동거가 한 달 만에 박살날 뻔 했던 것은 트루디에게도 큰 고비였다. 로키가 먼저 돌아간 뒤 키티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 집에 돌아온 트루디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멍청했다, 고.


 

트루디가 로키와 사는 곳은 맨해튼 한복판이었다. 아무리 쉴드가 박살났고, 어벤져스가 다른 일로 바쁘다 해도 일단 로키는 지구에선 위험한 범죄자였다. 트루디가 로키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종종 깜빡하곤 하지만, 로키가 지구에서 꽤 나쁜 사람이라는 건 변하지 않을 것 같았고, 게다가 생각해보니 아이언 맨이 드나드는 어벤져스 타워도 이 근처다. 로키와 함께 행복한 동거 생활을 만끽할 줄 알았던 꿈 많은 트루디는 새삼 현실의 가혹함을 확인했다.

“윗집에 쉴드 요원이 살줄은 몰랐어요…….”

“네가 들어와도 좋다고 계약한 거잖아.”

“그, 그야! 처음 만났을 때 착해보였고……. 그리고 쉴드 요원들은 자기 직업을 숨기는 게 직업 아니에요?”

환상 같은 클래식소리가 잦아들자 트루디는 신발 끈을 헐렁하게 푼 뒤 큼지막한 소파에 몸을 묻었다.

“아무튼. 오늘 일은 제 불찰이에요. 사실 로키가 굳이 맨해튼에 살 필요는 없었는데. 로키랑 같이 지낸다는 게 좋아서 제가 방심했어요.”

죄송해요오, 트루디는 푸쉭- 하고 꺼지는 소파와 쿠션에 얼굴을 숨기며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게다가, 아까도 로키에게 도움만 받고……. 저 혼자 있었다면 분명 키티가 조용히 넘어가주진 않았을 거예요…….”

트루디는 앞길이 막막했다. 앞으로 또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어쩌지? 가령 로키가 요 앞 편의점에 들르다 다른 쉴드 요원을 만나게 된다면, 혹은 근처에 있는 아이언 맨이 수트를 입고 날아가다 로키를 보게 된다면. 트루디는 이 환상 같은 시간이 언제 금갈지 모른다는 것이 새삼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그 때는…….”

생각을 말로 옮기던 트루디는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상황을 해결할 힘은 없으면서 그런 말을 하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멍청해보였다. 차라리 이대로 로키와 따뜻한 남미로 떠나버리면 어떨까 싶기도 했다. 트루디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우물우물 하는 사이 그 뒷말은 로키가 가로챘다.

“안 생겨.”

“……?”

전축의 볼륨을 조절하던 로키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말했다. 쿠션 너머로 로키를 빠끔히 훔쳐보던 트루디를 눈치라도 챈 듯, 로키가 친절히 설명했다.

“이런 일이 또 생기면 나도 귀찮으니까 말이지……. 자, 이러면 되잖아.”

드득거리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쇼팽의 즉흥환상곡이 듣기 좋은 크기로 흘러나왔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뒤를 돌아본 로키가 손가락을 튕겼고, 로키는 눈 깜짝할 사이에 로키와 비슷하지만 똑같지는 않은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어있었다. 가벼운 갈색의 곱슬머리와 새파란 눈. 그저 간단히 머리와 눈 색만 바뀌었을 뿐인데, 어쩐지 조금 더 상냥한 인상을 풍겼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트루디는 쿠션을 끌어안으며 작은 감탄사를 흘렸다.

“로키, 엄청 착해보여요.”

“그건 평소에는 나빠 보인다는 의미야?”

천사 같아, 하고 좀 더 진심에 가까운 그 뒷말을 말하진 못했지만 그 대신 트루디는 그건 또 아니라고, 평소에도 물론 로키는 착하고 멋져 보인다고 칭찬일색을 늘어놓았다. 로키는 그것이 싫지는 않은지 슬쩍 웃었다.

“로키가 저랑 있어준다니. 꿈만 같아요.”

트루디가 수줍게 웃었다. 로키는 부려먹기 좋은 인간이 너뿐이라며 살짝 툴툴댔지만, 트루디는 그것도 좋다며 소파에서 뒹굴었다. 갈색 머리, 푸른 눈의 어색한 로키가 트루디의 옆에 앉았다. 기분이 좋아진 트루디는 플로어의 물고기들이 얼마나 밥을 잘 먹는지 따위의 쓸데없는 얘길 늘어놓기 시작했다. 로키는 적당히 맞장구를 치거나 반박했고, 트루디는 정신없이 말하다 드득거리며 맴돌기 시작한 전축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로키는 평소보다 가까이 얼굴을 대고 있었고, 어느새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와있었다.


 

“아냐, 역시 이쪽이 좀 더 천사 같아.”

이번엔, 트루디는 속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윤기 나는 검은 머리와 보석 같은 초록 눈에 홀려 자신이 무슨 말을 뱉었는지 인지하지 못하던 트루디는 곧 자신이 한 말을 알아차렸고, 심히 부끄러워졌다. 장난스레 입 꼬리를 올린 로키가 일부러 얼굴을 들이밀며 트루디를 빤히 바라봤지만 트루디의 눈에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깐 이쪽이 나빠 보인다며?”

“제, 제, 제가 언제요?! 평소에도 착해 보인다고 했잖아요??!”

“싱겁긴. 나빠 보인다고 하면 좀 나쁜 짓을 해줬을 지도 모르는데.”

트루디는 얼굴이 터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쁜 짓? 어떤? 막아보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머릿속 망상 회로가 돌아가고, 그것을 인지하는 자신이 몹시도 부끄럽게만 느껴졌다. 다시 평소만큼의 거리로 돌아온 로키는 소파에 앉은 채 손가락을 튕겨 멈춘 전축을 다시 움직였고, 트루디는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다른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 그나저나. 키티가 착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로키를 신고하지도 않고! 아, 맞아 그러고 보면 아래층에 유나도 엄청 착해요! 저번엔 맛있는 케이크를 디저트로 줬어요! 로키는 유나네 없었으니까 못 먹었을 테지만요? 유나는 버키라는 사람이랑 살아요! 로키만큼 키가 크더라고요…….”

아, 정말이지 무슨 멍청한 얘길 하는 거람. 트루디의 달아오른 뺨이 좀 진정이 되었다 싶었을 때 로키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의 무게가 사라진 소파는 기우뚱하며 반대편으로 푹 꺼졌다. 몇 번이고 다시 틀어지던 노래도 멈췄다. 잔뜩 말하고 지친 트루디가 올려다보자 로키는 다시 갈색 머리, 푸른 눈으로 변하더니 트루디를 내려다보았다.

“저녁, 먹으러 가야지.”

내내 소파에서 뒹굴거리던 트루디는 헐렁한 신발끈을 꽉 조이곤 소파에서 일어섰다.

“저는 좀 더 천사 같은 쪽의 로키랑 같이 먹고 싶어요.”

의아한 표정의 로키가 서있는 동안 지갑을 챙기던 트루디가, 아직도 그 갈색머리 그대로인 로키를 보고 마저 설명했다.

“밥 먹다 쉴드에게 들키면 같이 잡혀가면 되니까요!”

로키는 그제야 한번 씩 웃고는 다시금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 트루디는 조금 용기를 내서 로키의 팔에 제 팔을 엮으며 현관을 나섰다. 로키는 끌려가는 게 그리 좋은 모양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트루디는 로키를 질질 끌고 아파트를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토니 스타크와 마주하게 된 트루디는, 토니의 앞에선 로키의 변신을 적극 권장했지만, 하여간 그 전까지 트루디는 새카만 머리와 초록 눈의 로키가 그 모습 그대로 있어주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Posted by Dreamin stellar
2015. 6. 22. 21:32

 

 

 

::6월6일 드림전력에 참가한 글입니다

 


 




오르골





그녀가 아는 한, 그는 전적으로 아날로그적인 사람이었다. 인간들이 마법이라고 부르는 것, 그러니까 얼핏 보면 자동화 된 것이 가득한 세계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의 관점은 충분히 아날로그적이었다. 그녀는 그것이 신기했다. 여기보다 간편한 세상에서 온 그가 충분히 크고 예쁜 손을 쓸데없이 움직여서, 작은 오르골 장난감의 태엽을 자꾸만 되감는 걸 보는 건 달리 말하지 않아도 신기한 광경이었다.

상황의 시작은 심플했다. 그녀가 여기저기 널브러진 이삿짐을 풀며 잡동사니 상자들을 정리하던 중 어릴 적 갖고 놀았던 오르골을 찾았다. 추억에 젖은 그녀가 태엽을 감자 상냥하고 작고 귀를 간질이는 동요가 흘러나왔다. 어릴 적,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애니메이션의 유명한 동요였다. 그녀는 오랜만에 여리여리한 그 동요를 듣는 게 좋아 태엽을 감은 채로 테이블 위에 올려뒀다. 물론 오르골은 축음기가 아니므로 몇 분 지나지 않아 소리가 멈췄지만, 아니 멈췄어야 했지만. 노래가 멈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노래가 온 집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잡동사니 상자의 작은 장난감들을 진열장에 줄 세우던 그녀가 무언가에 홀린 듯 오르골 소리에 고갤 돌렸다. 그곳엔 소파에 앉아 노래가 흘러나오는 오르골과, 오르골 위에서 사뿐히 춤추기 시작한 작은 발레리나를 빤히 바라보는 그가 있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바라본다는 걸 눈치 채지 못한 듯 했다. 그녀는 들키지 않게 하던 일을 하며 이따금 그를 힐끔거렸다. 그는 노래가 멎으면 다시금 태엽을 감았다. 오르골을 처음 본 아이처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녀는 그런 그가 끔찍이도 귀여웠다. ‘저 덩치에 오르골 태엽을 감고 있어!’ 그녀는 이삿짐을 정리하는 것도 관두고 눈치를 보다 그의 옆에 앉았다.

“정리도 안 도와주시다니! 그게 그렇게 좋아요?”

“미드가르드에도 이런 게 있었군.”

그는 정리에 대한 질문은 교묘히 피해갔다. 그녀도 교묘히 넘어갔다.

“음, 그럼 아스가르드에도?”

그녀가 물었지만, 그는 언제나 그렇듯 무의미한 대답은 피하고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가 대답하진 않았지만, 그가 지내왔던 곳에서도 저런 비슷한 게 있는 걸까,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그의 고향의 오르골을 상상해보려고 애썼지만 갑자기 생각하자니 막연한데다 그것보다도 정리할 짐이 산더미여서 그녀는 곧 다른 상자로 정신을 옮겼다. 그러다 이따금 오르골 소리가 돌리면 뒤를 돌아봤고, 그러면 자기가 건드린 게 아니라는 쀼루퉁한 표정의 그가 있었다.


급한 정리를 마치자 해가 저물고 있었다. 여전히 여기저기 널브러진 상자와 잡동사니 사이에서 둘은 간단한 저녁을 먹었다. 그는 그 후 다시금 오르골을 만지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있었는데 그녀는 간만에 그의 마음에 드는 물건을 찾아줬다는 것이 기뻐 싱글거리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의 마음에 드는 물건을 찾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비슷했다. 그의 기준은 확고하고, 까다로웠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처음 앤티크 찻잔을 찾았을 때나, 훌륭한 목재 책장을 찾았을 때 그가 만족스럽게 웃던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이거 로키 줄게요.”

설거지를 마친 그녀는 테이블 위의 오르골의 먼지를 닦아 건네며 말했다. 식후 잠시 숨을 돌리는 동안 차를 마시던 그가 영문 모를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고, 그녀는 굳이 오르골을 쥐여 주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사 오면서 챙겨온 건 전부 제 것밖에 없잖아요……. 여기엔 로키 물건이 하나도 없구나, 하고……. 그러니까 제가 이걸 로키에게 주면 로키 것도 하나 생기는 거예요!”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턱짓으로 테이블 위에 올려두라는 듯 슬쩍 웃었다. 그녀는 반짝반짝해진 오르골을 그의 찻잔 받침 옆에 두며 신이 나서 상자들을 옮겼다.

“그런데, 네가 틀렸어.”

그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녀가 상자를 옮기다말고 그를 돌아봤다.

“네가 내 것이니까, 따지고 보면 여기 있는 모든 게 내 것이지.”

그렇게 말하며 그가 오르골의 태엽을 감았다. 상자를 옮기다 말고 새빨갛게 얼어붙어버린 그녀와 이 상황이 재밌어서 클클거리기 시작한 그의 사이로 예쁜 오르골 소리가 가득히 메워졌다.





Posted by Dreamin stellar
2015. 6. 22. 21:29

 

 

 

 


어떤 맨해튼의 아파트






트루디의 삶은 대체적으로 잔잔했지만 한 남자와 엮이게 되며 제법 스펙터클해졌다. 자세하게는 한 남자를 좋아하게 되며 그에 따라 불가항력으로 이런 저런 사건들이 따라왔다고, 할까. 하지만 그건 벌써 아주 오래전처럼 느껴질 만큼의 3년 전 봄의 일이었고 그 후로도 가끔 이런 저런 일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트루디는 다시금 잔잔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트루디가 좋아한 남자는 좀 복잡한 남자였다. 좀 나쁜 남자였고, 좀 다른 남자였다. 어떻게 그를 만났고 어떻게 그와 말을 할 정도의 사이가 되었는지는 트루디 스스로도 가물가물하다. 그저 정신을 차리니 가끔 대화를 하고 있었고, 그런 것 치곤 그에게 홀딱 빠져 있었는데 트루디는 생각할 새도 없이 그 남자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로키였다.

그래, 로키. 트루디는 그에 대해 자세히 알진 못했지만 그 이름 하나만큼은 누구보다도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그 외에 트루디가 로키에 대해 아는 건 먼 행성에서 온 ‘신’이라는 것과, 3년 전 맨해튼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 것 정도였다. 그 외에는 자질구레하고 너무 단편적이어서 차마 맞춰지지 않는 퍼즐 같은 그의 어린 시절과 고향의 이야기들뿐이었다. 사실 이 자체로도 꽤나 많은 걸 알고 있는 것 같지만 트루디가 원하는 만큼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로키는 말하질 않고 트루디는 말하길 좋아하니 이 난제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아무튼 그가 자신의 별로 돌아간 후로도 종종 대화를 계속했던 트루디는 작년 말 즈음에 갑자기 끊긴 그의 연락에 불안해하며 지냈다. 우연찮게도 영국에 토르가 다녀갔다는 소문 -유튜브에서 봤다-이 한창인 시기여서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훑었지만, 그런 것 치곤 용케도 대입은 말짱히 치렀다. 트루디가 불안하건 말건, 어쨌든 트루디는 계속 살아 있어야했다. 혹시, 만약, 어쩌면 그가 다시 말을 걸거나 돌아와 줄지도 모를 어떤 날을 위해서. 그러니 트루디는 앞으로도 학교에 가고, 직장에 가고 하면서 그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올 줄은 몰랐다.

 

그가 자신의 별로 돌아갈 때 멀찍이서 보았던 빛의 기둥이 트루디의 집 앞에 내려왔을 땐 새벽 4시였다. 부모님이 여행을 가고 혼자 있어서 다행이지, 만약 부모님이 집에 계셨고, 그 빛을 뚫고 갑옷 차림으로 걸어 나온 남자가 트루디에게 다가왔다면 아마 부모님은 놀라서 거품을 무셨을 지도 모른다. 정말로 트루디는 그렇게 생각했다. 평소엔 말도 안 되는 소음에도 아랑곳 않고 잠드는 게 트루디의 특별한 능력 중 하나였지만 그 날은 달랐다. 어쩐지 잠이 오지 않아 밤새 TV 영화 채널을 돌리고 있는데 거실 창밖으로 그런 풍경이 펼쳐쳤다니. 그리고 갑옷으로 무장한 남자가 걸어와 트루디네 거실 창문에 노크하다니. 트루디는 아직도 그게 꿈만 같다. 트루디가 거의 눈물범벅으로 그가 들어올 충분한 크기의 큰 창문을 열었을 때 그가 가장 먼저 한 말은 “잠시 이곳에 머무르겠어.”였다. 어째서? 트루디는 이유도 알지 못한 채 기쁘다고 느꼈다.

사실 트루디에게 이유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트루디가 좀 진정이 되고 나서야 로키는 새 거처를 구할 것이고, 트루디도 근처에 있어야한다고 말했다. 여전히 지구에 머무르는 이유는 가르쳐주지 않은 채, 로키의 말로는 믿을 만한 인간 -아무리 생각해도 트루디밖에 없지만- 이 곁에서 편의를 봐주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게 결국 트루디였다. 지금 같이 살자고 말하는 건가? 그런 것 치곤 전혀 로맨틱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의 트루디는 머리도 복잡하고 눈앞의 상황은 더 복잡해서 분위기에 젖어 새빨간 얼굴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트루디가 학교를 떠올린 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어느새 트루디의 소파를 차지한 로키에게 내어줄 차를 우리는 도중 그것이 문득 생각났다. 냉장고에 붙은 달력에 휘갈긴 낙서 탓인지도 모른다. “……저 내년부턴 학교에 가는데요.” 트루디가 말했다. 사실 로키가 원한다면 3-4년쯤은 휴학할 생각도 있었지만 그래도 트루디는 일단 한 번 찔러는 봤다. “그런데?” 로키가 대답했다. “아니, 학교에 가도 되는 건가…싶어서…….” 트루디는 슈거 스틱으로 홍차를 저으며 말했다. “가지 말라고 한 적은 없는데.” 로키는 의외로 순순히 허락해줬다. 사실 중요한 건 트루디가 말할 뒷내용이었지만. “…근데 그게 맨해튼…에 있는 대학인데요…….” 찻잔을 달달 떨며 건네는 트루디를 보다가, 로키는 찻잔을 받았다. 도무지 속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로키가 말했다. “재밌군.” 몇 번 홀짝이던 로키는 차가 너무 달다고 하면서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후로 어떻게 일이 해결 되었는지는 트루디의 이해 범위 밖이었다. 의외로 로키는 덤덤했고, 눈치를 보던 트루디가 “그럼 맨해튼에 살아도 괜찮아요?” 하고 물었을 때도 로키는 썩 기뻐보이진 않았지만 어쨌든 허락은 해줬다. 로키가 싫다면 맨해튼 지구 반대편에 살아도 괜찮다는 트루디에게 귀찮을 만큼 괜찮다, 고 로키가 말하고 나서야 이 문제가 해결되었다. 하지만 맨해튼에 사는 건 그렇다 치고 집값은? 트루디는 통장 잔고를 생각해보다 울상을 지었다.


다음 날, 둘은 일을 벌인 김에 차를 타고 -운전은 트루디가 했다- 강 건너편의 아파트 지구를 구경하러 갔다. 근처의 부동산에 가서 이런 저런 집을 둘러봤지만 전부 가격이 문제였다. 그래서 보다 못한 로키가 “치러야 할 값에 관계없이 집을 고르라.”고 했을 때 트루디는 대뜸 이 아파트를 골랐다. 물론 로키는 좀 더 크고, 웅장한, 그러니까……. 궁전 같은 집을 원했지만 맨해튼 근처에 그런 집은 드물뿐더러 그런 집에 들락거린다면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거라고 트루디가 몇 번이나 주장하고 나서야 그는 고집을 꺾었다. 트루디가 이 아파트를 고른 이유는 처음엔 단순했다. 그저 시가에 비해 싸고 -주인이 급하게 처리한 모양이다- 외관이 예쁘고 내부도 유럽풍인데다 말끔해서였지만 사실 학교와 교통편이 편한 것 치곤 동네가 조용하기도 했다. 가격을 보곤 좀 놀랐지만 로키가 마법으로 슬쩍 보여준 금붙이들을 보곤 더 놀랐다. 사실 한 층만 매입할 생각이었지만 저 정도면 아스가르드의 보물 창고는 전부 털어온 게 아닌가 하며, 트루디는 열 개도 넘는 보석상을 돌고 나서야 그 아파트를, 그러니까 내친김에 그 아파트 자체를 매입할 수 있었다. 이쯤에 이르러 생각해보니 로키가 싫어하지 않을 만큼의 착한 사람들을 다른 층에 세를 들이면 학비에도 좋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아파트의 명의는 트루디의 앞으로 했다! 하긴, 로키는 사회 보장 번호 같은 게 없으니 자기 앞으로 된 건물을 갖는 게 무리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비싼 건물을 대뜸 트루디에게 주다니……. 트루디는 새삼 ‘왕자’의 씀씀이에 놀랐다. 하지만 정작 아파트를 사놓고 보니 새 학기의 시작까진 여유가 있었고 지금 맨해튼으로 이삿짐을 옮기기엔 쌀쌀한 날씨여서 트루디는, 이사는 잠시 미루기로 했다. 대신 아파트를 사고도 잔뜩 남은 돈으로 로키와 함께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기왕이면 눈이 없을만한 곳으로.

트루디와 로키가 여행에서 돌아왔을 땐 봄이 가까이 와있었다. 그 사이 트루디의 대리인이 1층에 세를 들였다고 했고, 트루디는 혹시 모를 엘리베이터 고장에 대비해 2층으로 이사하기로 했다. 그리고 1층의 커플과 인사를 나누고 -다행히 착해 보였다- 자질구레한 일을 정리한 뒤 트루디가 강 너머의 원래 집에서 짐을 옮기자 정말로 정말로 트루디와 함께, 로키는 이곳에 머물게 되었다. 미드가르드, 어떤 맨해튼의 아파트에 말이다.


 

 

 


 




Posted by Dreamin stell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