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돗님, 리호님과 함께하는 드림버스의 글입니다
::오리주가 등장합니다
“보통은 아무 마음이 없는 상대에게 키스하진 않잖아. 그렇지? 두 남녀가 키스를 했다면, 특히 남자가 여자에게 키스했다면 그 남자는 분명 여자를 좋아하는 거잖아? 뽀뽀도 아니었어. 키스였다고. 좋아하……는 건지 확실히는 몰라도 호감 정도는 있는 거잖아? 심지어 내가 먼저 해달란 것도 아니었는데 -그럴 명분도 없지만- 그쪽에서 먼저 키……스 하는 건 아무리 봐도 날 좋아하는 거잖아? 역시 그렇지?? 그런데 왜, 도대체 왜!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는데 왜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하냐고-! 하아…….”
트루디가 말을 거는 상대는 1층 플로어의 물고기들이었다. 둘 사이에 그 일이 있은 후로 며칠이 더 지나서 어느새 크리스마스를 앞둔 느긋한 이브의 오후, 트루디는 플로어의 물고기들에게 밥을 주며 중대한 사건을 논의하던 중이었다. 과연 로키가 나를 좋아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얼만큼? 지구의 -연인들의- 축제인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이제 막 키스를 한 어색한 두 남녀는 어떤 크리스마스를 보내야 하는가? 물론 물고기들이 대답할 리는 없었다. 그래도 누군가에게 이 문제를 털어놓는 것만으로 트루디의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처음엔 윗집 키티에게 조언을 구해볼까 싶다가도 -키티는 그 ‘토니 스타크’와 꾸준히 교제하는 연인이니까- 곧, 키티가 로키의 정체를 알고 있단 사실을 떠올리곤 관두었다. (전 쉴드 요원에게 맨해튼을 박살낸 침략자와 키스했다고 말 할 수 없었다.) 그 다음엔 아래층의 유나에게 조언을 구해볼까 싶었지만……. 트루디가 보기에 유나는 버키와의 일로 바빠 보였다. (요즘 유나와 버키의 사이가 유독 좋았다.) 그렇다고 토니에게 말 할 수도 없었고, (제정신이라면 절대 그러진 못 할 거다.) 버키에게 말 할 수도 없었다. (이건 말 안 해도 당연하다.) 친한 친구들은 방학을 맞아 전부 서부로 떠났고, 이 사건의 주범인 로키에겐…….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수건을 사이에 둔 키스 비스 무리한 것을 제외한다면 둘의 첫 키스 후로 트루디는 로키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는 몇 시간을 겪어야만 했다. 끔찍하게 부끄럽고 민망한 시간이었다.
“실은 아직도 로키랑 눈만 마주쳐도 도망가고 싶어지는데. 그런데 내일은 크리스마스고……. 있잖아, 어떡해야 좋을까?”
테이블에 턱을 괸 트루디가 물었다. 어항 안의 물고기들은 대답 대신 물속을 뱅글뱅글 헤엄치며 물거품을 뱉어냈다.
* * *
“커피, 마실 거야?”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는 중인 트루디가 간신히 벽에 기대어 서있는 반면 로키는 아무렇지도 않게 머그를 꺼냈다. 그리고는 다 식어버린 포트의 전원을 올리고 찬장에서 트루디의 머그를 꺼내며 고개를 까딱였다.
저기, 잠깐만요. 우리 방금 키스했잖아요. 트루디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도 생생한 로키의 향과 어깨를 감싸던 크고 단단한 손, 겨우 5미리 정도의 거리에서 바라본 반쯤 감긴 로키의 눈동자, 입술이 잠깐씩 떨어질 때 로키가 내뱉던 한숨, 수증기, 시원한 로키의 혀, 자신도 모르게 배배꼬이던 야릇한 기분을 떠올리면 -아니 떠오르는 것을 버텨내고 있으면- 도무지 입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도대체 지금 이 상황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어떤 말을 해도 바보 같은 상황이 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정작 로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끓기 시작한 커피포트를 들어올렸다.
“마실 거야, 말 거야.”
“아, 안 마셔요.”
“그럼 언제까지 거기 서있을 건데?”
머그에 커피를 반쯤 채운 로키가 커피를 휘젓던 스푼을 내려놓고는 소파로 돌아갔다. 그러는 사이 트루디는 간신히 의자에 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니, 잠깐. 우리가 키스했다고? 왜? 로키가 트루디에게 키스할 이유가 있던가? 게다가 어젯밤 일이 꿈도 아니라고? 키스를 했으면 그 다음엔? 그냥 다시 평범한 동거로 돌아가는 건가? 아니, 잠깐. 그런데 두 남녀가 동거를 하는 일 년 동안 아무 일이 없었잖아. 그럼 이제 시작이라는 건가? 로키도 나를 좋아하나? 아니, 그런데 우리 사귀는 건 아니잖아. 우리 키스해도 되나? 아니, 잠깐. 잠깐만. 그런데 내가 진짜 로키랑 키스했다고? 아스가르드에서 온 왕자님이랑? 내가 좋아하는 외계인이랑? 아니, 그런데, 내가, 진짜?
“왜 그렇게 파닥거려. 뭐야, 부끄러웠어?”
거실에서 로키의 목소리가 들렸다. 트루디는 몇 번인가 입을 벙긋거리다가 결국은 대답하는 걸 포기하고 이상한 소리가 새어나올 것 같은 입을 막았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집에서 도망쳐서 키티네든, 유나네든, 1층 플로어든, 아니면 맨해튼 밖으로라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정말로 로키에게 부끄러운 걸 들킬 것만 같아서 간신히 참았다. 대신 트루디는 새빨간 얼굴로 화장실에 들어가서는 두 시간동안 샤워를 하고 나왔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로키는 잠시 밖에 다녀온다는 쪽지를 남기고는 사라진 뒤였다. 트루디는 조금 진정한 상태로 소파에 앉아 다 식은 커피를 마셨다. 두세 번 숨을 고른 트루디는 얼마 지나지 않아 소파 위에 쓰러져서는 이상한 비명을 질렀다. 오래도록.
로키는 나간 지 네 시간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어디에 다녀왔냐고 물을 용기는 차마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이 충분한 시간을 가진 트루디는 예전처럼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 진정한 상태로 그를 대할 수 있었다. 트루디가 저녁을 준비하는 걸 깜빡해서 둘은 다시 밖으로 나갔다. 저녁은 종종 가는 평범한 레스토랑에서 먹었다. 가끔 그랬듯이 연인이라는 오해도 받았고, 디저트로 나온 포춘 쿠키에서 ‘인연에 진전이 있을 것이다’라는 단골 멘트도 나왔다. 하지만 트루디는 다 들켜버린 지 오래인 짝사랑에 진전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어쩌면 서로의 모습이 연인으로 보이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로키가 도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하고 있었는데도 트루디는, 어쩐지 그가 약간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즐겼는지도 모른다.)
아파트로 돌아온 둘은 간단히 씻고선 잠깐씩 딴 짓을 하다 12시가 되기 전에 침대에 누웠다. 그러고 보면 로키와 한 침대에서 잠든 지 1년이 다 되어간다. 처음 한 침대를 쓰기로 했을 땐 로키가 엄청 쀼루퉁했었지. 트루디는 처음 아파트를 둘러보던 날을 떠올렸다. 로키는 굳이 가장 큰 사이즈의 침대를 원했고, 그런 침대가 들어가는 방은 제일 큰 방 뿐이었다. 하지만 아파트는 거실이 넓었고, 제일 큰 방 다음의 방은 너무 작아서 제일 작은 침대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거실에 침대를 놓자니 로키가 싫어했고, 큰 방에 침대를 두 개 두자니 그것도 로키가 싫어했다. 트루디는 그 당시 이 문제를 놓고 사흘을 고민했다. 로키가 지구에 머무는 동안에는 가장 좋은 대접을 해주고 싶었다. 애초에 맨해튼에서 지내게 된 것이 트루디의 생떼였으니, 침대에 관한 로키의 생떼 정도는 당연히 들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거실의 소파에서 트루디가 자는 게 가장 괜찮은 결론이라는 그녀의 말을 듣고선 로키는 선심을 쓰듯 자신의 옆자리를 양보했다.
물론 당황한 트루디가 30번쯤 거절했다. 그러다가 결국엔 로키가 ‘내 옆자리에서 자는 게 싫은 거냐’며 은근하게 속삭인 탓에 거의 반쯤 미쳐서는 로키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트루디가 너무 기뻐서 당황하기 전에 ‘그냥 잠만 같이 자는 거야’라고 로키가 못을 박긴 했지만.
그 일이 있은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간다. 그 말 그대로 로키는 정말로 잠만 잤다. 처음엔 트루디의 잠버릇에 꽤나 성질을 부렸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알아서 넘어간다. 로키와 한 침대에서 잔다는 설렘에 밤을 새기 일쑤였던 트루디도, 이제는 침대에 눕자마자 잠에 들 자신이 있다. 누군가 둘을 본다면 답답하겠지만, 그래도 둘은 그게 편했다. 로키를 너무 좋아하는 트루디는 로키가 좋다면 다 좋았고, 로키는 원래부터 자기 마음대로 지냈으니 둘은 전혀 불편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로키가 키스했다. 트루디가 로키를 좋아하던 몇 년 동안 싱겁게 웃기만 하던 로키가 드디어 트루디에게 다가왔다. 그동안 몇 번쯤 장난 같은 고백을 하기도 했고, 언제나 좋아하는 티를 내고 다니던 트루디에게도 이 상황은 당혹스러웠다. 물론 언젠가 로키가 자신의 마음을 받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다.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닌 오늘 말이다. 침대에 누워 로키의 숨소리를 듣던 트루디는 겁이 났다. 이제 두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걸까? 트루디는 여전히 로키를 좋아할 것이다. 그건 변하지 않을 테지만 어느 날 갑자기 로키도 트루디를 좋아하게 되어버리면, 그렇게 되면 모든 게 변할 것이다.
트루디는 겁이 났지만 로키가 옆에 있어준다면 어쨌든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로키는 몇 천 년을 사는 신이라서, 내일 당장 트루디를 떠날 일은 없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그러자트루디는 긴장이 스르르 풀리면서 편하게 잠에 들었다.
그 날 밤, 트루디는 산타에게 연애 상담을 하는 꿈을 꿨다. 산타 할아버지, 로키가 저에게 키스했어요. 이제 로키에게 프러포즈해도 될까요? 어떡하죠? 산타는 허허허 웃으면서 트루디에게 선물로 미슬토 한 다발을 안겨주었다. 크리스마스에는 온 세상에 미슬토가 가득하지. 산타는 천장을 가리켰다. 천장을 올려다 본 트루디는 수북히 반짝거리는 미슬토를 보며 당황했다. 저기, 그럼 저 산타 할아버지랑 키스해야 해요? 그리고 트루디는 깨어났다.
* * *
그래서 결국은 물고기들에게 하소연하는 상황까지 왔다. 트루디는 조금 시무룩했고, 그보다 더 조금 억울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조금 화가 나기도 했다. 물고기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미슬토 아래에 선다고 해도, 로키가 다시 키스해 주지 않을 수도 있잖아.”
트루디는 소파에 앉아 어항을 들여다보며 다시 혼잣말을 시작했다.
“들어봐, 내 계획은 아파트 천장을 미슬토로 도배하는 거야! 로키랑 내가 어디에 있어도 그 위에 미슬토가 있게끔 말이지. 뭐,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는 당연히 해야지. 아, 집 안에도 물론! 제일 좋은 건 로키에게 와인을 사오라고 한 다음에 미슬토를 붙이는 건데, 일단 집 안을 끝내면 그 다음엔 엘리베이터, 그 다음엔 계단이랑 플로어! 우리 둘은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맞으면서 미슬토를 올려다보는 거지. 그리고…….”
물고기들에게 계획을 털어놓던 트루디는 결심이라도 했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선 아파트 밖으로 향했다. 해가 지면 계획을 실행에 옮길 시간이 없게 되어버린다. 모르긴 몰라도 일단 준비는 해놓자! 로키는 외출할 일이 없다고 했으니 계속 집 안에 있을 것이다. 트루디는 무작정 근처 인테리어 가게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남아있는 모든 미슬토를 결제했다. 하이스쿨 시절 파티 홀을 꾸밀 때도 이렇게 많은 미슬토를 산적은 없었는데……. 트루디는 경악할 만한 영수증을 기세 좋게 북북 찢어버리고는 -자, 이제 환불도 못 한다- 쇼핑백을 가득 들고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양 손에 가득한 쇼핑백을 지하 주차장에 숨겨두고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집에 돌아갔다.
와인을 깜빡했는데 로키가 사다주지 않을래요? 아니면 로키가 칠면조 요리 해줄래요? 고민하던 로키는 역시나 살짝 툴툴거리며 전자를 택했다. 코트를 입은 로키가 아파트 밖으로 나서는 것을 확인한 트루디는 심호흡을 하며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는 지하주차장으로 달려갔다.
한 시간 남짓이 지나자 1층 플로어, 엘리베이터, 복도, 현관, 거실의 천장은 온통 미슬토 천지였다. 로키가 와인을 사러 나간 한 시간 동안 트루디는 결국 아파트 천장을 미슬토로 도배해버렸다. -다행이도 미슬토는 양면 접착테이프로 사용하는 것이라 천장으로 던지기만 하면 붙었다- 한 번의 키스로 로키에게 굴복할 바에야, 여러 번의 키스로 갈 때 까지 가보겠다. 뭐, 트루디가 내린 나름의 결론이었다.
물론 로키가 순순히 키스해 줄 거란 보장은 없었다. 그저 귀여운 크리스마스의 장난으로 넘어갈 수도 있을 테고. 하지만 트루디는 로키에게 말하고 싶었다. 만약 로키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키스를 해준다면, 그게 트루디라면. 아주 짧은 트루디의 100년 동안 로키가 옆에 있다면, 트루디가 사라진 후 로키가 후회하지 않을 거라면. 그러면 그 100년 동안 5천 년의 사랑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어차피 둘은 실컷 아팠다. 그러니까 둘 다 조금 더 아프고 상처받을 자신이 있다면 그걸 잊어버릴 만큼의 행복한 순간들을 만들어보지 않겠느냐고. 그러니까 지금보다 조금은 더 서로를 좋아해보지 않겠느냐고.
로키가 받아들여도, 거절해도, 어떻게 된다고 해도 좋았다. 트루디는 겁나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어도 로키가 조금 더 옆에 있어줄 거란 달콤한 확신이 있었다.
* * *
와인을 사러 밖으로 나온 로키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북적거리는 인파에 짜증이 났다. 하지만 그는 곧 짜증을 내는 것도 잊고서 와인 가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가 짜증을 잊은 이유는 다름 아닌 트루디 때문이었다. (물론 이 짜증의 원인 또한 그녀이긴 했지만.)
셉터를 찾아 지구로 돌아와 허탕을 친 로키가 아스가르드로 돌아가지 않은 건 단순한 변덕이었다. 5월이 끝날 무렵, 로키는 셉터의 마인드 젬이 누군가의 손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고는 결국 셉터를 되찾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면 아스가르드로 돌아갈 때였지만, 로키는 마인드 젬의 동태를 살펴야 한단 합리화로 이곳에 남았다. 뭐, 마침 지루하고 평화로운 미드가르드 생활이 생각보다 즐겁기도 했고, 골머리 앓는 왕의 일로 지쳐있기도 했었다. 자신을 따르는 작은 인간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는 것도 나름 재밌었고, 그 인간을 놀리며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 시간이 이제 겨우 1년이 지났을 뿐인데. 그런데도 로키는 어쩐지 오랜 시간을 이렇게 살아왔다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시내를 향해 걷던 로키는 빨갛고 반짝거리는 도시를 둘러보았다. 로키는 문득 아스가르드를 떠올렸다. 아스가르드에도 축제는 많았고, 당연히 이보다 더 성대하고 큰 장식도 많았다. 로키의 기준으로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작은 도시가 반짝거리는 것을 트루디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떠올리자 헛웃음이 나왔다. 트루디는 이것보다 더 크고 반짝이는 왕국을 보면 얼마나 더 좋아할까. 얼마나 더 꺅꺅거리고, 로키를 향해 흥분해선 얼굴을 붉힐까. 쓰잘데기 없는 상상이지만 걷는 동안 로키는 그 상상에 푹 빠졌다. 덕분에 그는 와인 가게를 두 블록이나 지나쳤다.
왔던 길을 되돌아와서 와인 가게에 들어간 로키는 항상 마시던 와인이 동났다는 걸 알고는 약간 실망했다. 적당히 달콤하고 기분 좋은 과일향이 나서 로키도, 트루디도 잘 마실 수 있는 유의 와인이었다. 로키는 점원에게 그것과 비슷한 와인이 없는지 물었지만, 연인들의 축제인 크리스마스를 앞둬서 그런지 적당히 달고 좋은 가격대의 와인은 모두 동난 후였다.
로키는 남아있는 와인들을 하나씩 시음하며 적당한 와인을 찾으려 했다. 이 와인은 너무 드라이했고, 이 와인은 이상한 꽃향기가 났다. 이건 산미가 강했고, 이건 트루디에게 도수가 너무 높았다. 결국 보다 못한 점원이 로키에게 찾는 와인이 있냐고 물어왔다.
“10도 이하의 레드 와인. 달큰하고 과일향이 나는 것. 아니면 화이트 와인도 상관없어.”
“연인분이랑 같이 마실건가봐요?”
로키가 의아하단 얼굴로 눈썹을 으쓱이자 점원이 덧붙였다.
“평소엔 여러 종류의 와인을 사가시면서, 낮은 도수의 달콤한 와인을 사실 때면 항상 기뻐 보이시거든요.”
그리고서 점원은 약간 가격대가 있지만, 로키와 트루디에게 알맞은 와인을 몰래 꺼내주었다. 로키는 다른 말없이 그 와인을 샀다. 아까 점원의 말에 딱히 부정을 하지 않아서 그런지, 사은품으로 와인 잔 두 개를 넣어줬다. 점원은 예쁜 빨간 리본으로 포장한 쇼핑백을 건네고는 슬쩍 웃었다. 로키는 그 웃음의 의미를 해석하는 대신 눈이 거세진 거리로 나왔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보니, 왜 굳이 도수가 낮고 달콤한 와인을 샀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주로 와인을 마시는 건 로키고, 트루디에게 너무 단 와인은 위험하다. 트루디는 달콤한 거면 뭐든 많이 먹으려고 하니까. 그 생각을 하니 다시 와인 가게로 돌아갈까 싶었지만 결국엔 귀찮아서 관뒀다.
돌아오는 길에도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로키는 짜증을 내지 않았다. 가게에서의 점원의 말이 신경 쓰여 온통 정신이 팔렸기 때문이었다. 정말 로키가 달고 낮은 도수의 와인을 살 때면 기쁜 티를 냈던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로키가 자신의 와인 취향을 트루디에게 맞춰주던 건 언제부터였지? 로키가 언제부터 트루디를 고려하게 됐지? 트루디가 늦으면 신경이 쓰이던 건? 트루디가 잠결에 다른 남자의 이름을 부르는 게 찝찝하던 건? 아홉 세계의 왕인 로키가 트루디의 와인 심부름을 하게 된 건 또 언제부터였지? 그러게, 그런데 또 며칠 전엔 왜 트루디에게 키스했지?
더 이상한 건 로키가 그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은 게 즐거웠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로키는 트루디와 함께 단 와인을 마시는 게 즐거웠고, 트루디가 일찍 들어오는 게 즐거웠고, 트루디가 잠결에 로키의 이름을 부르는 게 즐거웠다. 그리고 트루디에게 키스하는 게 즐거웠다.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눈이 내리는 맨해튼 거리엔 사람이 많았다. 반짝이는 전구와 지나치게 행복한 캐롤도. 그 거리를 걸어 아파트로 돌아오는 내내 로키는 자신이 들떠 있다는 걸, 가능하다면 계속 들떠있고 싶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한 인간 때문에.
* * *
와인이 담긴 쇼핑백을 현관에 내려둔 로키는 미슬토로 가득한 집안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아파트의 입구부터 반짝이 가루가 가득하더니. 그는 곧 미슬토 아래에 선 두 남녀는 키스를 한다는……. 쓸 데 없는 장난이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짜잔-! 이르지만 메리 크리스마스!”
“천장은 왜 저래. 심부름 보내놓고 겨우 이거 한 거야?”
“겨우 이거라뇨! 미슬토 아래에서 키스하는 건 인류의 오랜 전통이라고요!”
산타 모자를 쓰고 로키를 맞이한 트루디는 당당하게 허리에 손을 얹고선 자신의 작품을 자랑했다. 완전 빈틈없고, 완벽하죠? 트루디는 칭찬을 바라는 아이처럼 설레했다. 그 모습을 보며 현관에 서서 잠시 뚱하게 있던 로키는 결국은 집 안으로 들어와 테이블 위에 와인을 올려뒀다.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트루디가 신경 쓰였지만 그는 천천히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쳤다.
“왜, 저번 키스가 아쉬웠어?”
“뭐, 뭐예요! 그런 거 물어보면 실례예요!”
“그럼 그 이전엔 키스해본 적 없어?”
“아……. 있어요.”
“흠, 언제? 어디서? 누구랑?”
“고등학교 프롬 때, 나무 뒤에서, 파트너랑요.”
“나 이외의 다른 남자랑 키스를 했단 말이지.”
트루디는 여전히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코트를 정리한 뒤 뒤돌아 트루디를 내려다 본 로키는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산타 모자를 잡아당겼다. 그런 걸 대놓고 말하는 건 뭐야. 로키의 찌푸린 얼굴에 화들짝 놀란 트루디가 뒤로 살짝 물러났고, 이를 놓칠 리 없는 로키가 다시금 트루디의 앞으로 바싹 다가갔다.
“그, 그땐 로키가 저한테 관심 없었잖아요!?”
“그래도 그렇지.”
자기가 먼저 시작해놓고 슬슬 뒷걸음질 치던 트루디는 어느새 등에 닿은 창문의 시원한 느낌에 가볍게 놀랐다. 창틀에 걸터앉은 트루디가 바로 앞의 로키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항복이에요. 어색하게 웃은 트루디가 양 손을 드는 제스처를 취했다. 우리 몇 걸음 걸었지? 로키가 물었다. 잘은 몰라요, 대충 열다섯 걸음? 트루디가 대답했다. 미슬토로 도배된 천장을 보며 한숨을 내쉰 로키가 조그맣게 웃었다.
“내가 이런 미드가르드의 장난에 어울려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게다가 누구는 겨우 한, 두 번의 키스도 감당하지 못하는 어린애면서 말이지.”
“그러니까, 이건, 로키가, 그, 좀, 익숙하게, 만들어, 줬으면, 좋겠는, 데요.”
떨리는 손을 꼬옥 쥔 트루디가 어색하게 웃었고, ‘내가 왜?’ 라고 대답할 것 같은 표정으로 트루디를 바라보던 로키는 기분이 좋은지 장난스레 웃었다. 그리고는 트루디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며 차가운 입김을 후, 불었다. 깜짝 놀란 트루디가 어깨를 으쓱이자 로키가 말했다.
“그것보다, 할 말이 있어.”
“뭔데요?”
차가운 바깥 공기를 마시며 돌아온 로키가 트루디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작은 미드가르드의 도시에서, 작은 아파트로 돌아오는 겨우 20분 동안, 로키는 그 어느 때보다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을 모르는 트루디는 자신의 계획이 성공한 줄 알고 긴장했고, 로키는 자신이 깨달은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로키가 말했다.
“내가 다시 널 찾아왔을 때 말했지. 잠시 이곳에 머무르겠다고. 하지만 네가 그렇게나 나를 좋아한다면, 아주 조금은 더 있어줄 수도 있어.”
로키의 말에, 트루디는 로키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지만 그를 처음 봤을 때 남들과는 다른 그의 모습을 봤던 것 같다.
“귀찮은 인간들의 기념일도 챙겨줄게.”
맨해튼 시내를 벗어나려고 달리는 사람들을 뒤쫓아 가다가 그를 처음 봤다. 이상한 옷차림의 사람이 혼자 시간이 멈춘 듯 서있었다. 비명소리와 폭음이 가득한 맨해튼을 올려다보던 그가 슬프게 웃는 모습을 봤었다. 주위는 그렇게 시끄러운데 그에게 뭔가 한 마디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만약에 운명이란 게 있다면, 그 시간 그 장소에 분명 있었다.
“로키.”
가던 길을 따라가면 시민들을 대피시키는 소방차가 있었을 거다. 하지만 트루디는 더 이상 달리지 않았다. 무서웠고, 다리가 풀릴 것 같았지만 그 남자를 두고 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같이 도망칠래요? 처음 보는 남자에게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물어봤더니 남자는 매섭게 째려봤다.
“그런데 너도 알겠지만 내가 사고 친 게 많아서, 계속 같이 지내려면 갑자기 도망칠 일이 생길지도 몰라.”
그리고 헤어진 다음엔 어떻게 만났더라? 트루디는 엉망이 된 맨해튼을 떠올렸다. 그곳에서 살아 돌아온 후로 잊을 수 없는 남자의 얼굴을 계속 간직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러다가 둘은 어느 날 아직 덜 고쳐진 맨해튼 구석의 허름한 공원에서……. 아, 소중한 과거를 떠올리던 트루디는 둘이 어떻게 만났는지 보다는 결국은 만났다는 게 중요하다고 결론 내렸다. 트루디가 추억을 더듬는 동안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던 로키가 문득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그 땐 다 버리고 같이 도망쳐야 하는데. 어쩔래? 그래도 좋아?”
물론 -약간 한눈팔던- 트루디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기뻐하며 대답했다. 왜냐하면 그건 로키의-
“저 도망치는 거 되게 좋아해요.”
고백이니까.
아, 저도 할 말 있어요.”
“뭔데?”
트루디는 자신이 너무 기뻐서 입이 떨어지지 않을 거란 걸 알았다. 만약 로키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키스를 해준다면, 그게 트루디라면. 아주 짧은 트루디의 100년 동안 로키가 옆에 있다면, 트루디가 사라진 후 로키가 후회하지 않을 거라면. 그러면 그 100년 동안 5천 년의 사랑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어차피 둘은 실컷 아팠다. 그러니까 둘 다 조금 더 아프고 상처받을 자신이 있다면 그걸 잊어버릴 만큼의 행복한 순간들을 만들어보지 않겠느냐고. 그러니까 지금보다 조금은 더 서로를 좋아해보지 않겠느냐고. 이 모든 말을 하지 못하리란 걸 알았다.
그래서 그냥 짧게 요약했다.
“내일 시간나면 저랑 결혼할래요?”
로키는 잠깐 고민하더니 답했다.
“……벌써부터 결혼은 좀 그렇고, 일단 키스부터 하고 생각해보지.”
“에? 그치만 방금 로키 저한테 고백한 거 아니었어요? 잠깐, 아, 아니 그럼 사귀는 건 어때요??”
“키스부터.”
로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정말요? 트루디의 대답에, 로키는 대답대신 주먹을 쥔 트루디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당황한 트루디의 손이 허둥대는 걸 놓치지 않고는 자연스레 파고들었다. 깍지를 낀 로키의 손이 물기로 촉촉한 창문에 맞닿았다. 밖엔 눈이, 아니면 크리스마스가 오고 있었다. 열다섯 걸음이랬나? 로키가 입으로 되뇌자 트루디가 크게 눈을 깜빡였다. 제법 각오한 표정의 트루디가 로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키스는 꼭 입에만 하는 건 아니잖아.”
그의 말에 바싹 긴장한 트루디를 보던 로키는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천장에 남아있는 미슬토는 많았다. 로키는 속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하며 하나,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둘, 그 다음은 눈꺼풀. 셋, 그 다음은 코. 넷, 다섯, 그 다음은 두 뺨. 여섯, 그 다음은 입. 일곱, 그 다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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