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 1. 20:50

 

 





::돗님, 리호님과 함께하는 드림버스의 글입니다

::오리주가 등장합니다

​::드림 전력에 자유 주제로 참여한 글입니다



알콜향 새벽과 커피향 아침​



 

   완전한 겨울. 다다음 주면 크리스마스였다. 거리에는 슬슬 눈이 쌓이기 시작했고, 캐롤도 흘러나왔다. 연말을 앞두고 방학을 맞은 트루디는 새벽이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와선 침대 위로 바로 쓰러졌다. 그런 트루디를 기다리며 밤새 자다 깨길 반복한 로키는 침대 위로 쓰러지는 물컹한 느낌에 눈을 떴다. 새벽 네 시. 두꺼운 코트로 빵빵해진 트루디가 쓰러져서 잠들어있었다. 왜 이제 들어왔냐, 옷은 좀 갈아입고 자라. 트루디에게 잔소리를 하고 싶었지만, 트루디가 거하게 취하기도 했거니와 이미 잠든 탓에 소용없는 일이었다. 결국 로키는 트루디를 대신해 그녀의 더플코트를 벗기고, 가디건과 스웨터도 벗겼다. 안경도 침대 옆 테이블에 올려두고……. 얇은 민소매 한 장과 겨울용 청바지를 입은 트루디는 로키가 옷을 벗기는 동안에도 침대에 누워 알아듣지도 못할 외계어 잠꼬대를 하며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트루디 때문에 잠시 깼던 로키도 시원한 차림의 트루디를 침대로 밀어 넣고서 다시금 잠에 들었다. 아니 잠에 들려고 했다. 트루디가, 잠결에 몸을 부비며 로키의 품안으로 들어오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트루디의 잠버릇이 원래 이런 건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말로는 뭔가 껴안아야 더 잠이 잘 온다는 거였다. 예를 들면 평소에 안고 자는 기다란 무민 인형 같은 것. 애석하지만 그 인형은 지금 세탁기 속에 있다.

   트루디는 로키를 무민 인형 대용품쯤으로 생각하는 듯 했다. 로키의 기다란 팔을 꼬옥 안더니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애를 써서 로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쯤 되면 정말 잠든 게 맞는지, 술김에 말도 안 되는 애교를 부리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갔지만 로키는 괜히 시끄럽게 소리를 내는 대신 그녀를 얌전히 떼어냈다. 방금 전까지 밖에 있었는데도, 트루디는 따뜻했다. 달큰한 술 냄새가 트루디의 머리에 배어있었다. 새벽 늦게 들어온다는 말만 했지, 술을 마신다는 말은 없었는데. 깨어나면 어떤 말로 괴롭혀줘야 좋을까. 로키는 괘씸한 마음에 몇 번이나 트루디를 밀쳐냈지만 트루디는 오늘따라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로키가 신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마지막으로 트루디를 떼어내려는 찰나, 로키의 팔꿈치에 코를 박은 트루디는 작게 낑낑대며 좀 더 올라와 로키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색색이는 트루디의 숨소리가 바로 밑에서 들려왔다. 로키는 트루디를 떼어내지 않고 잠시 그대로 있었다. 자신의 목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물론 로키는 곧 진정했다. 그리고 로키는 이번에는 따뜻한 그녀를 떼어내는 대신 트루디가 깔고 누운 자신의 팔을 빼내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길고 치렁치렁한 머리가 로키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시원한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로키는 머리가 엉키지 않도록 정리한 뒤 테이블 위의 머리끈으로 그것들을 정리해 묶었다. 그리곤 추위 때문인지 알코올 때문인지 코가 새빨간 트루디를 내려다보았다. 빨간 코의 트루디가 로키의 어깨와 목덜미에 얼굴을 대고 얼굴을 비볐다. 체리향이 나는 립밤으로 촉촉한 그녀의 입술이 쇄골 언저리를 지나치며 향을 뿜었다. 로키는 잠든 여성에게 부적절한 스킨십을 하는 것이 신사의 도리가 아니란 것쯤은 알았지만, 무릇 남자들이 어째서 잠든 여성에게 그런 것들을 시도하는 것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고 느꼈다. 하지만 로키는 잠든 트루디를 결국은 옆으로 끌어내리며 그녀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제발 좀 얌전히 잠들어라. 그렇게 생각하며 로키는 등을 돌렸다.

 

   트루디는 얌전히 잠들었나 싶더니, 다시 로키를 찾아 꼼지락거렸다. 막 잠에 들려던 로키는 슬슬 귀찮아진 상태라서 그것을 모른 체 내버려두었다. 이불을 끌어당기려 꼼질거리던 트루디는 판판한 로키의 등에 닿자 그의 등을 두드리며 중얼댔다.

   “저기요……. 누구신지 모르겠는데 여기 로키 자리거든요- 제 옆에 자면 안 돼요…….”

   “저기요-? 이 이불도 저랑 로키 거거든요…….”

   “……그쪽도 취했어요??”

   하, 그 순간 로키는 작게 웃었다. 취한 건 너겠지. 아무래도 곱게 잠들기는 글렀다. 왜냐하면 로키에게 좋은 장난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굳이 잠들기를 관두고 등 뒤의 트루디에게 고약한 장난을 걸기 시작했다.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달링. 우리 결혼했잖아?”

   “그러니까… 댁이 누구신데…….”

   “…제임스.”

   “지미? 너 나랑 결혼했어!?”

   적당히 둘러댄 이름이 그녀의 입에서 되풀이되자 약간은 화가 났지만, 로키는 이 지독한 장난에 한껏 재미가 든 상태였다. 그는 훌륭히 ‘지미’를 연기하며 취한 트루디를 놀렸다. 우린 눈이 내리는 미술관에서 만났고, 내가 작년에 작은 다이아 반지로 프러포즈 했고, 넌 그걸 받고 펑펑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그 다음엔 시애틀 근처의 작은 아파트를 얻었고, 허니 문은 하와이에 다녀왔고, 재미도 없고 평범한 일상들을 블라블라.

   “아, 애도 있어.”

   “뭐? 아들? 아니면 딸?”

   “아들, 딸. 쌍둥이.”

   “쌍둥이?? 아니… 내 로키는 어쩌고……?”

   “아까부터 로키라니, 도대체 그 사람이 누구기에 그렇게 찾아대는 거야.”

   “어… 로키는, 그러니까 내……. 나의…….”

 

   등을 돌린 채 눈을 감고 바보같은 말들을 속삭이던 로키는 뒤가 조용해지자 고개를 돌렸다. 흐리멍덩한 눈으로 반쯤 잠든 트루디가 더 바보같이 울고 있었다.

   “로키는 나의…….”

   그것도 아까부터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그녀는 뭐가 그렇게 속상한지 -아니 대충은 알겠지만- 로키가 그녀를 바라보는 줄도 모른 채 더욱 크게 울기 시작했다. 그녀가 꺽꺽대며 울 때 마다 시큰한 레몬 향이나 알콜 향이 뿜어 나왔다.

   “로키가, 로키를… 그러니까 로키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인데……. 그래서, 로키는… 나의 소중한…….”

   “…….”

   “…사실 연인이었으면 좋겠어. 아니면 남편도 좋아.”

   울면서 하는 말 치곤 당돌했다. 아이같이 소리 내어 우는 트루디가 왜 못나 보이지 않는 걸까. 로키는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약간 짜증나긴 하지만 그것은 트루디가 울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니면 그냥 옆에 있기만 해도 돼.”

   로키는 하는 수 없이 작정하고 울기 시작한 트루디를 일으켜서 등을 다독여주었다. 겨우 어제 빨았던 베개나 이불을 적실 수는 없었다. 폭신한 침대 위에서 그녀는 전에 없을 만큼 크게 울었다. 원체 우는 일이 없는 트루디가, 로키가 본 것 중에 가장 크게 우는 것 같았다. 로키는 가슴 구석 어딘가가 답답했다. 묵직하고, 찐득한 진흙처럼 철벅거렸다. 분명 시작은 장난이었는데 찝찝한 새벽이 되어버렸다. 무엇보다도 내일 아침 트루디가 깨어나면 술에 취한 기억은 모두 잊어버리는 그녀가 지금의 기억도 잊을 거라는 게……. 차라리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녀가 지금을 기억하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르니까.

   “지미. 우리 이혼해.”

   “트루디?”

   “미안해, 미안. 지미. 정말 미안……. 나 로키한테 고백해야해.”

   로키는 눈물로 가득 찬 트루디의 눈가를 소매로 닦아주었다. 그녀는 술에 취한데다 안경도 벗고 있어서 아직도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를 모르고 있다.

   “그치만…… 로키는 내 전부야.”

   아, 취소. 방금 전의 말은 취소다. 그녀가 지금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 가능하다면 평생 기억했으면 좋겠다. 로키는 오랜만에 자신이 따뜻하고 먹먹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도 자신보다 두 뼘은 작고 1000살쯤 더 어린 인간에게. 문득 생각해보니 누구에게서도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오딘? 형제였던 토르? 하물며 자신을 가장 아껴주던 어머니인 프리가에게서도 그런 말은 듣지 못했다. 전부라니. 그런 건 거짓말이거나 깨닫지 못하는 착각인 쪽이 더 가능성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트루디의 눈은……. 모르겠다. 로키는 잠시 멍한 채로 생각을 멈췄다. 확실한 건 로키가 이제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그래. 그럼 이혼하자.”

   “지미, 정말 미안… 내가 무슨 생각으로 너랑 결혼한 건지, 아니, 아니 물론 지미는 좋은 사람이지. 착하고, 싹싹하고, 눈도 예쁘고.”

   “그만, 그건 됐고. 대신에….”

   로키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허공을 쏘아보던 트루디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안경이 없어서 그런지 트루디는 인상을 쓰며 눈앞의 물체를 분간하려 애썼다. 지미? 트루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로키를 바라봤다.

   “이혼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키스해도 돼?”

   “……아, 응.”

   로키는 자신이 알지도 못하지만 착하고 싹싹하고 눈도 예쁜 지미라는 남자에게, 흔쾌히… 까지는 아니더라도 키스를 허락한 트루디가 약간은 괘씸했다. 하지만 뭐 어떻겠는가. 지금은 로키가 지미였다. 트루디는 지미에게 미안하다, 따위의 쓸데없는 말을 속삭이며 눈을 감았고 지미는 그녀의 체리맛 입술에 키스했다. 그 달콤한 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혼 전의 마지막 키스보다는 결혼 직전의 달콤한 키스에 더 가까웠다.

 

 

*      *      *

 

 

   “머리가 깨질 것 같아요.”

   냉수를 네 잔째 마시며 싱크대에 얼굴을 박은 트루디가 말했다. 주말 오후가 되어서야 깨어난 트루디는 거의 죽어가는 소리를 내며 집안을 좀비처럼 돌아다녔다.

   “그러기에 새벽까지 술을 마신 네 잘못이지.”

   “으윽, 그치만 취직한 지미가 계산한다고 큰소리를 쳐서……. 거기 비싼 칵테일이 잔뜩 있었다고요? 알콜 도수 낮은 걸로 다섯 잔, 아니 딱 열 잔만 마시려고 했는데.”

   “그래도 용케 집은 찾아왔네.”

   “지미가 택시 태워줬던가, 그럴걸요?”

   지미, 지미, 그놈의 지미. 로키는 불쾌하게 익숙한 이름을 들으며 우아하게 소파에 앉아 우아하게 신문을 구겼다. 트루디는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다. 어젯밤의 이혼 놀이나, 자기의 전부가 로키라던 시시한 고백이나, 단 내가 나던 키스 같은 것도. 물론 예상치 못했던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무사히 집에 와서 다행이에요. 좀 이상한 꿈을 꾸긴 했지만요. 꿈에 로키가 나왔던 것도 같은데.”

   “어떤 꿈인데?”

   “아, 그건……. 부끄러워서 비밀.”

   “나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비밀이라니, 우리가 언제 이렇게 서운한 사이가 됐어?”

   “로, 로, 로키랑 제가 어떤 사이인데요?”

   “글쎄, 내가 너의 전부인 사이.”

   원래는 슬쩍 떠보려던 건데, 그의 말에 다섯 번째 냉수를 마시던 그녀가 물을 뿜었다. 트루디는 한 1분 쯤 가만히 로키를 바라보더니 떨어트린 컵을 간신히 주워 싱크대에 담으며 그를 바라봤다. 트루디가 어젯밤의 일을 완전히 잊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꿈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만. 사실은 어제의 일이 꿈이 아니었고, 어제의 지미가 지미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면 트루디는 어떤 표정으로 로키를 바라볼까.

   “……로키?”

   “그래.”

   “……나 지미랑 이혼 한 거 알아요?”

   “결혼한 적도 없어.”

   “꿈 아니에요?”

   “아니야.”

   “그럼, 어제, 그거, 로키? 나, …로키한테 ……고백.”

   “했어.”

   “대… 대답은….”

   “비밀이야.”

   그리고 로키는 사뿐히 신문을 접었다. 그는 신문을 읽는 대신 보기 좋게 새빨개진 얼굴의 트루디를 보기 위해 몸을 틀었다. 과연, 그녀는 홍당무가 되어서 주방 구석의 벽에 쓰러지다시피 기대있었다. 그, 그럼. 키스는? 그녀가 두 뺨을 감싸며 새어나오려는 비명을 막았다. 뭐, 못할 일을 한 건 아니지 않나? 왜냐하면 트루디의 전부는 로키고 -그녀 입으로도 인정했고- 로키의 전부, 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의 일부도 트루디였으니까. 로키는 어느새 그녀와 로키가 서로의 일부를 차지하게 되었다면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로키를 자신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다시 나타나리란 보장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로키가 기억하는 한 어제의 키스는 썩 나쁘지 않았으니까.

   키스도 했다고 대답할까? 로키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무슨 대답을 할지는 정하지 않았다. 별로 중요한 대답도 아니었다. 그녀가 어젯밤의 일을 기억한다는 게 더 중요했다. 로키는 그녀의 마지막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다 읽은 신문을 소파에 던져두고 아직도 주방에서 로키를 바라보며 옴짝달싹 못하는 트루디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녀가 뭔가 더 쓸데없는 말을 하기 전에 다시 키스했다. 트루디는 처음엔 흠칫 놀라더니 이내 눈을 감고 로키의 팔을 잡았고, 로키는 주방 벽에 기대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방 전체에 커피포트가 끓는 소리가 들리고 쌉싸래한 커피향이 둘을 휘감았다. 시끄러워. 그렇게 생각한 로키는 정신을 못 차리는 트루디를 보다가 살짝 고개를 돌려선 요란하게 끓고 있던 포트의 전원을 껐다. 그리고는 다시금 하던 일에 집중했다.

 

 

 

Posted by Dreamin stell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