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흥환상곡
“아, 정말 큰일 날 뻔 했어요……. 그렇죠?”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닫은 트루디는 심장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제 앞에는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인 로키가 느긋이 전축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가 긴 손가락으로 바늘을 툭 건드리자, 쇼팽의 즉흥환상곡이 흘러나왔다. 큰 폭풍이 지나간 것 같았다.
1시간 전, 평소와 다름없이 플로어의 관상식물에 물을 주고 올라오던 트루디는 4층 아가씨인 키티의 갑작스런 부름에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어째서 자신을 부르는 걸까. 트루디는 분명 새로 이사 왔으니 자기소개라도 하려는 거겠거니, 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4층으로 향했다. 도착한 키티의 집은 상상했던 것보다 넓고 멋졌다. 분명 아래층과 같은 구조일 텐데도 뻥 뚫린 거실은 어쩐지 개운한 느낌마저 들었다. 하여간 트루디는 키티의 안내에 따라 테이블에 앉으며 자신의 윗집에 사는 그녀의 생활을 나름대로 상상해보려 애썼다. 여자 혼자 이 넓은 곳에서 혼자 지낸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하고 생각할 즈음 키티가 말을 꺼냈다. 그 -그러니까 로키-에 관한 걸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고. 당황한 트루디가 어떤 변명으로 잘 빠져나가야 뒷감당이 없을까, 하고 생각할 때 키티가 결정타를 날렸다. 그리고, 키티가 실은 로키의 정체를 아는 쉴드 요원이었다는 말에 거의 얼어붙은 트루디가 울기 직전에 로키가 찾아왔다.
그 후엔 대체적으로 원만한 해결이었다. 로키는 말썽을 피우지 않겠다 약속했고, 키티는 그 약속을 믿어주기로 했다. 트루디는 그저 옆에서 두 사람이 이 아파트 -어쩌면 지구-의 평화를 약속하는 걸 멀뚱히 바라볼 뿐이었다. 뭐, 로키가 키티와 약속의 상징으로 새끼손가락을 걸었을 때엔 조금 부럽긴 했지만……. -그건 아직 트루디도 하지 못한 것이었으니까- 하여간 하마터면 좋아하는 범죄자와의 동거가 한 달 만에 박살날 뻔 했던 것은 트루디에게도 큰 고비였다. 로키가 먼저 돌아간 뒤 키티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 집에 돌아온 트루디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멍청했다, 고.
트루디가 로키와 사는 곳은 맨해튼 한복판이었다. 아무리 쉴드가 박살났고, 어벤져스가 다른 일로 바쁘다 해도 일단 로키는 지구에선 위험한 범죄자였다. 트루디가 로키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종종 깜빡하곤 하지만, 로키가 지구에서 꽤 나쁜 사람이라는 건 변하지 않을 것 같았고, 게다가 생각해보니 아이언 맨이 드나드는 어벤져스 타워도 이 근처다. 로키와 함께 행복한 동거 생활을 만끽할 줄 알았던 꿈 많은 트루디는 새삼 현실의 가혹함을 확인했다.
“윗집에 쉴드 요원이 살줄은 몰랐어요…….”
“네가 들어와도 좋다고 계약한 거잖아.”
“그, 그야! 처음 만났을 때 착해보였고……. 그리고 쉴드 요원들은 자기 직업을 숨기는 게 직업 아니에요?”
환상 같은 클래식소리가 잦아들자 트루디는 신발 끈을 헐렁하게 푼 뒤 큼지막한 소파에 몸을 묻었다.
“아무튼. 오늘 일은 제 불찰이에요. 사실 로키가 굳이 맨해튼에 살 필요는 없었는데. 로키랑 같이 지낸다는 게 좋아서 제가 방심했어요.”
죄송해요오, 트루디는 푸쉭- 하고 꺼지는 소파와 쿠션에 얼굴을 숨기며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게다가, 아까도 로키에게 도움만 받고……. 저 혼자 있었다면 분명 키티가 조용히 넘어가주진 않았을 거예요…….”
트루디는 앞길이 막막했다. 앞으로 또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어쩌지? 가령 로키가 요 앞 편의점에 들르다 다른 쉴드 요원을 만나게 된다면, 혹은 근처에 있는 아이언 맨이 수트를 입고 날아가다 로키를 보게 된다면. 트루디는 이 환상 같은 시간이 언제 금갈지 모른다는 것이 새삼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그 때는…….”
생각을 말로 옮기던 트루디는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상황을 해결할 힘은 없으면서 그런 말을 하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멍청해보였다. 차라리 이대로 로키와 따뜻한 남미로 떠나버리면 어떨까 싶기도 했다. 트루디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우물우물 하는 사이 그 뒷말은 로키가 가로챘다.
“안 생겨.”
“……?”
전축의 볼륨을 조절하던 로키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말했다. 쿠션 너머로 로키를 빠끔히 훔쳐보던 트루디를 눈치라도 챈 듯, 로키가 친절히 설명했다.
“이런 일이 또 생기면 나도 귀찮으니까 말이지……. 자, 이러면 되잖아.”
드득거리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쇼팽의 즉흥환상곡이 듣기 좋은 크기로 흘러나왔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뒤를 돌아본 로키가 손가락을 튕겼고, 로키는 눈 깜짝할 사이에 로키와 비슷하지만 똑같지는 않은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어있었다. 가벼운 갈색의 곱슬머리와 새파란 눈. 그저 간단히 머리와 눈 색만 바뀌었을 뿐인데, 어쩐지 조금 더 상냥한 인상을 풍겼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트루디는 쿠션을 끌어안으며 작은 감탄사를 흘렸다.
“로키, 엄청 착해보여요.”
“그건 평소에는 나빠 보인다는 의미야?”
천사 같아, 하고 좀 더 진심에 가까운 그 뒷말을 말하진 못했지만 그 대신 트루디는 그건 또 아니라고, 평소에도 물론 로키는 착하고 멋져 보인다고 칭찬일색을 늘어놓았다. 로키는 그것이 싫지는 않은지 슬쩍 웃었다.
“로키가 저랑 있어준다니. 꿈만 같아요.”
트루디가 수줍게 웃었다. 로키는 부려먹기 좋은 인간이 너뿐이라며 살짝 툴툴댔지만, 트루디는 그것도 좋다며 소파에서 뒹굴었다. 갈색 머리, 푸른 눈의 어색한 로키가 트루디의 옆에 앉았다. 기분이 좋아진 트루디는 플로어의 물고기들이 얼마나 밥을 잘 먹는지 따위의 쓸데없는 얘길 늘어놓기 시작했다. 로키는 적당히 맞장구를 치거나 반박했고, 트루디는 정신없이 말하다 드득거리며 맴돌기 시작한 전축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로키는 평소보다 가까이 얼굴을 대고 있었고, 어느새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와있었다.
“아냐, 역시 이쪽이 좀 더 천사 같아.”
이번엔, 트루디는 속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윤기 나는 검은 머리와 보석 같은 초록 눈에 홀려 자신이 무슨 말을 뱉었는지 인지하지 못하던 트루디는 곧 자신이 한 말을 알아차렸고, 심히 부끄러워졌다. 장난스레 입 꼬리를 올린 로키가 일부러 얼굴을 들이밀며 트루디를 빤히 바라봤지만 트루디의 눈에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깐 이쪽이 나빠 보인다며?”
“제, 제, 제가 언제요?! 평소에도 착해 보인다고 했잖아요??!”
“싱겁긴. 나빠 보인다고 하면 좀 나쁜 짓을 해줬을 지도 모르는데.”
트루디는 얼굴이 터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쁜 짓? 어떤? 막아보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머릿속 망상 회로가 돌아가고, 그것을 인지하는 자신이 몹시도 부끄럽게만 느껴졌다. 다시 평소만큼의 거리로 돌아온 로키는 소파에 앉은 채 손가락을 튕겨 멈춘 전축을 다시 움직였고, 트루디는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다른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 그나저나. 키티가 착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로키를 신고하지도 않고! 아, 맞아 그러고 보면 아래층에 유나도 엄청 착해요! 저번엔 맛있는 케이크를 디저트로 줬어요! 로키는 유나네 없었으니까 못 먹었을 테지만요? 유나는 버키라는 사람이랑 살아요! 로키만큼 키가 크더라고요…….”
아, 정말이지 무슨 멍청한 얘길 하는 거람. 트루디의 달아오른 뺨이 좀 진정이 되었다 싶었을 때 로키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의 무게가 사라진 소파는 기우뚱하며 반대편으로 푹 꺼졌다. 몇 번이고 다시 틀어지던 노래도 멈췄다. 잔뜩 말하고 지친 트루디가 올려다보자 로키는 다시 갈색 머리, 푸른 눈으로 변하더니 트루디를 내려다보았다.
“저녁, 먹으러 가야지.”
내내 소파에서 뒹굴거리던 트루디는 헐렁한 신발끈을 꽉 조이곤 소파에서 일어섰다.
“저는 좀 더 천사 같은 쪽의 로키랑 같이 먹고 싶어요.”
의아한 표정의 로키가 서있는 동안 지갑을 챙기던 트루디가, 아직도 그 갈색머리 그대로인 로키를 보고 마저 설명했다.
“밥 먹다 쉴드에게 들키면 같이 잡혀가면 되니까요!”
로키는 그제야 한번 씩 웃고는 다시금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 트루디는 조금 용기를 내서 로키의 팔에 제 팔을 엮으며 현관을 나섰다. 로키는 끌려가는 게 그리 좋은 모양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트루디는 로키를 질질 끌고 아파트를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토니 스타크와 마주하게 된 트루디는, 토니의 앞에선 로키의 변신을 적극 권장했지만, 하여간 그 전까지 트루디는 새카만 머리와 초록 눈의 로키가 그 모습 그대로 있어주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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