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7. 26. 23:54

 

 

네가 없을 때


 

전쟁 같은 아침 기상이 지나고 -로키가 보기에 그건 전쟁 보다는 부산스런 서커스에 가까웠지만, 트루디는 아침 기상을 꼭 전쟁이라고 표현했다- 트루디가 학교로 떠나면 로키는 조용한 거실에서 아침을 먹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트루디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는 컸다. 그건 그녀가 그만큼 존재감 넘치는 타입이라기 보단 그저 로키 옆에 찰싹 달라붙다시피 지내서 그런 것이었지만, 하여간 트루디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는 컸다. 로키는 그 조용하고 공허한 시간이 좋기도 싫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은 싫은 쪽에 좀 더 가까웠다. 트루디가 일어났을 때부터 쿨럭 거리던 하늘은, 트루디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비를 게워내기 시작했다. 가벼운 여름 소나기가 아니었다. 그러보고니 장마가 온다고 했던가. 로키는 TV에서 이상한 비닐 옷을 입고 떠들던 기상캐스터를 떠올렸다. 일주일 내내 장마라는 말을 잘도 웃으며 지껄이던 기상캐스터를 떠올리다 언짢아진 로키는 먹던 샐러드를 싱크대에 내버리곤 가장 안쪽의 방으로 들어갔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온 집안이 축축하고 창밖으로는 빗소리도 들려온다. 로키는 트루디의 귀가 시간까지 집에 처박혀있는 게 싫었다. 이런 날 혼자 있으면 구질구질한 생각들이 따라 나온다. 옆에 소란스런 트루디라도 있으면 정신이 팔려서 좀 덜 할 텐데. 로키는 에어컨의 제습 기능을 최대로 올려놓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제 막 켜져서 시끄럽게 윙윙거리는 에어컨 소리마저 짜증났다. 로키는 눈을 지그시 감고 명상이라도 할까 하다가, 아무것도 안 하는 쪽이 더 귀찮은 생각이 따라 나올 것 같아 거실로 나왔다. 로키는 거실 구석의 전축의 볼륨을 최대로 키워 빗소리를 가리고-아랫집이나 윗집에서 항의가 들어와도 알 바 아니었다-, 창문에 커튼을 쳤다. 거실의 에어컨 제습 기능도 최대로 올린 로키는 소파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얼마 전 트루디가 잔뜩 사온 쓸데없는 철학책 중 하나였다. 로키는 적당히 아무 페이지나 펼쳐 팔랑거리는 척을 했다. 내용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지만, 로키는 머릿속에서 정렬되지 않는 단어들의 나열을 눈으로 쫓아가며 비가 온다는 사실을 잊으려고 노력했다. 적어도 아스가르드, 토르, 프리가, 오딘에 관한 것들은 잊으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럴 수 없었지만-


 

문이 열린 건 그 때였다. 그것도 아주 세차게 열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로키는 시끄러울 정도의 전축의 볼륨을 끄곤 문을 바라봤다. 열린 현관 밖에는 마치 비에 쫄딱 젖은 생쥐 같은 모습을 한 트루디가 헉헉대며 로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수건…….”

옷도, 머리도 비에 범벅이 된 귀신같은 트루디가 그렇게 말하자 로키는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바보 같은 표정을 한 트루디가 현관에서 차마 집으로 들어서질 못하고 -거실을 적시고 싶지 않았나보다- 계속 수건, 수건하고 외쳤다. 로키는 트루디가 수건을 달라고 문장을 완결 짓지 못하고, 급한 마음에 수건이라는 단어만 버벅대며 외치는 모습이 어이가 없을 정도로 웃겼다. 로키가 킥킥대며 웃기 시작하자 트루디는 더욱 당황해선 현관에서 통통대며 화장실에 손을 뻗었다. 트루디의 손끝에 간신히 닫은 화장실 문이 열렸지만, 더 안쪽의 찬장에서 수건을 꺼내긴 힘들어보였다. 낑낑대던 트루디가 그제야 로키의 이름을 불렀다.

“로키! 수건요!”

“알았어, 알았어.”

여전히 킥킥대며 소파에서 일어선 로키는 트루디가 현관에서 쩔쩔맨 지 5분은 지나서야 수건을 꺼내주었다. 왜 트루디가 돌아왔는지, 왜 비를 쫄딱 맞았는지는 몰라도 지금 로키는 이 상황이 꽤나 즐거웠다. 로키가 수건을 건네자 트루디는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수건에 얼굴을 묻었다. 축축한 안경을 닦고 시야가 밝아지자, 트루디는 이번엔 옷을 닦기 시작했다. 에어컨 공기로 가득한 방 안은 제법 추웠다. 트루디는 약간은 파들거리며 치마를 벅벅 문질렀다. 머리부터 먼저 말릴 것이지, 하고 로키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로키는 저도 모르게 수건을 하나 더 꺼내왔다.

“뒤돌아 서.”

“?”

아까운 치마 다 버렸다며 울상이던 트루디가 올려다보자, 로키는 나직이 말했다. 머리 말려야지?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상냥한 말투에 트루디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등을 돌렸다. 로키는 트루디의 길고 검은, 그리고 젖은 머리에 수건을 덮었다. 위에서 부터 수건을 문지르며 머리끝까지 내려오자, 수건은 벌써 축축했다. 빗물. 트루디에게 적셔졌던 빗물이 수건을 타고 로키의 손에도 닿았지만, 로키는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로키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트루디의 머리를 말려주는 게 좋았다. 로키는 그렇게 한참동안 트루디의 긴 머리를 잘 쓰다듬어주며 이 작은 인간이 감기는 걸리지 말길, 하고 기도했다.

“아, 이, 이제 드라이기로 말릴게요…….”

로키의 손길에 한동안 얌전히 있던 트루디는 새빨개진 얼굴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무리 말렸다고 한 들 트루디의 몸에서 떨어지는 빗물들은 어쩔 수 없이 거실을 적셨다. 방 안쪽에선 윙윙거리는 드라이기 소리가 예전 전축 소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빗소리를 감춰주었다. 로키는 난장판이 된 거실을 바라보다가 제 손에 들린 축축한 두 번째 수건을 빨래 통에 던졌다. 제법 귀여운 소란이었다.

 

“갑자기 왜 돌아온 거야? 우산이라면 근처 편의점에서 사도되는데 멍청하게 비에 젖기나 하고 말이지.”

침대에 앉아 머리를 말리던 트루디는 로키의 말에 예? 예? 하고 되묻다가 결국 덜 마른채로 드라이기를 껐다. 로키는 상냥하게도 같은 내용을 세 번이나 말해주었다.

“아, 그게……. 지각해서 택시를 잡으려고 뛰어가는데 갑자기 비가 오지 뭐예요…….”

로키는 비를 맞으며 택시를 부르는 트루디를 상상했다. 그것도 지금 만큼이나 좀 웃긴 것 같았다.

“아무래도 금방 멈출 것 같지 않아서, 근처 편의점에서 우산을 사서 계산하려고 했는데…….”

이미 편의점에 들어서면서부터 쫄딱 젖은 트루디라니, 로키는 트루디가 좀 불쌍하게 보였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편의점 알바분이, 오늘 내내 비가 온다고 하지 뭐예요. 장마가 시작되는 날이라고…….”

장마. 로키는 잊고 있던 사실도 떠올렸다.

“그래서. 로키가 혼자 있다고 생각하니까, 저도 모르게 뛰어와버렸어요…….”

로키는 잠시 생각하는 걸 멈췄다. 대신 로키는 자신을 올려다보며 지금부터 비를 싹 잊게 해줄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가자고, 은근슬쩍 데이트를 신청하는 트루디의 손에서 수건을 빼앗았다. 로키는 대답 대신에 트루디의 얼굴에 수건을 덮었다. 그리고 침대에 앉아있던 트루디가 채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놀란다던가, 비명을 지른다던가- 로키는 트루디의 입 위의 수건에 입을 맞췄다. 축축한 수건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 트루디의 말랑한 입술이 느껴졌다.


 

“머리 제대로 말리고, 영화 보러 나갈 준비 해. 택시 탈거니까 각오하고.”

로키는, 그렇게 말하며 젖은 첫 번째 수건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그 후 한참이 지나서 방안에서 뭔가 기이한 비명소리가 들린 것 같긴 하지만……. 어질러진 거실과 현관은, 나중에 다녀와서 정리하기로 하고, 로키는 가벼운 외투를 걸쳤다. 그리고 계속 생각했다. 방금 전 왜 자신이 트루디에게 키스 -아니면 그 비슷한 것-를 했는지.





Posted by Dreamin stellar